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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여군 장교 은행원이 됐을땐…

군인·바리스타·주식시황 캐스터·삼성맨

여성·비정규직 차별…하나은행으로 이직


"군 얘기·서비스정신 등 이전 경험이 도움"

여기 특이한 경력의 은행원들이 있다. 인생 2모작에 성공해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해병대 여군 장교, 스타벅스 바리스타, 케이블 텔레비전 주식시황 캐스터, 삼성코닝 생산직 직원 등 화려한 전직을 자랑한다. 20대부터 40대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이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일하다 하나은행에서 뭉쳤다. 김상희(33) 망원역지점 대리, 박준학(30) 가좌공단지점 대리, 김성일(44) 본부 여신관리부 과장, 이정미(28) 분당시범단지지점 행원. 이들이 4일 오전 서울 을지로 하나은행 본점에 모였다.

이들의 이직 사유는 우리 사회에서 일자리에 얽혀있는 문제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동시에 갖가지 걸림돌을 극복하고, 전직의 경험을 살려 현직의 업무에 성공적으로 이어가고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 왜 첫 직장을 떠났나?

유리천장. 일 잘하고 똑똑해도 사회에서 여성이 높은 지위에 오르는 걸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일컫는 말이다. 해병대 여군 학사 장교였던 김상희 대리가 은행으로 이직한 이유였다.

해병대 간부후보생 89기인 김 대리는 군인이 되고 싶어 대학 2학년 때부터 방학 때마다 해병대 캠프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가했다. 포항 해병교육훈련단에 새겨진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글귀를 보며 그는 해병대에 입대한 걸 결코 후회하지 않으리라고 여겼다. 지옥훈련으로 인간의 한계를 넘나들며 빨간 명찰을 달면서 2003년 소위로 임관했다. 거친 해병대원들을 지휘하며 5년을 보냈다. 그는 소령이 되고 장군도 되고 싶었지만 해병대에서 여군 소령이 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결국 군복을 벗었다.

비정규직. 박준학 대리의 전직에 붙어있던 꼬리표다. 박 대리의 아버지는 장교 출신이었다. 엄격한 아버지 아래 자란 탓인지 내성적이었다. 2006년 스타벅스에 입사해 아르바이트로 일하다 계약직으로 1년 일하게 됐다. 커피숍에선 다양한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뉴욕에서 마시던 맛과 다르다." "청담동에서 마시는 것 보다 쓰다." "커피 한 잔에 5800원이나 받나?" 바리스타라는 멋진 이름을 얻었지만, 삶은 그렇지만도 않았다. 시급 3500원은 스타벅스 커피 한잔값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 역시 스타벅스 직원 유니폼을 벗었다.

이정미 행원의 꿈은 아나운서였다. 졸업을 앞둔 2007년 언론사 시험 준비반 선배와 함께 한 경제전문 케이블 티브이(TV)에 시황캐스터로 일하게 됐다. 코스피와 코스닥 시황을 매시간 짧게 보도하는 일이었다. 그 또한 비정규직 일자리였다. 앞날은 불안했다. 안정적인 미래를 갖고 싶었다. 어느 날 함께 일하던 선배가 안정적인 직장을 찾겠다며 하나은행에 지원하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이정미 행원은 그 선배를 따라 하나은행 입사시험을 쳤다. 같이 간 선배는 떨어지고, 그는 붙었다.

불확실성. 김성일 과장은 학교를 졸업하고 1992년 삼성코닝에서 일하다 3년 뒤 회사를 그만뒀다. 주위 사람들은 삼성이라는 좋은 회사를 왜 그만두느냐며 말렸지만 그는 불안했다. 컨베이어벨트에서 끝없이 나오는 브라운관을 만드는 작업은 그를 지치게 만들었고, 앞으로 10년, 20년이 지나서 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 점이 선이 되듯 이어지는 삶

'나는 해병대다.' 김상희 대리는 은행원 생활을 하며 힘들 때마다 마음속으로 이 말을 새긴다. 해병대 출신이어서 남자 고객들과도 자연스레 군대 얘기를 하며 고객과의 유대감을 넓히곤 한다. 해병대 장교를 상징하는 빨간 반지를 끼고 온 고객과 만날 때면 언제나 즐겁다. "해병대 선후배님들, 하나은행 망원역지점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밀듯이 오셔서 은행계좌 터 주세요."

박준학 대리는 바리스타와 은행원은 많이 닮았다고 말한다. 비싼 커피를 마시는 고객들이 높은 서비스를 기대하는 것처럼, 은행 고객들도 자신의 돈을 맡기면서 많은 서비스를 요구한다. 카페라떼처럼 향기로운 은행을 만들고 싶다는 박 대리는 "바리스타의 경험이 있었기에 고객의 눈높이를 잘 맞출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게 됐죠." 이정미 대리도 마찬가지다. 돈을 만지는 은행원들은 사회변화에 선도적으로 적응할 필요가 있는데, 시황 캐스터를 하면서 좋은 경험을 얻게 됐다는 것이다. 김성일 과장은 삼성코닝에서 배운 시스템적인 사고 방식이 은행 업무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했다.

Posted by Takumi

2012/01/06 10:04 2012/01/06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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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파 안부러워요
도이치방크 홍콩지점 이희원씨 - 타임·NYT 읽으며 영어 독학, 끈기로 모자란 실력 채워나가
애플 싱가포르 지사 김현아씨 - 어학연수·해외여행도 안해… 취업 후 5년간 '맨땅에 헤딩'
일본 에이벡스 그룹 원성공씨 - 한국인의 적극성과 우리 의식, 日 기업서 그대로 인정 받아


외국에서 살다 온 일도 없고, 해외 대학 학위도 없다. 그래도 그들의 무대는 국내가 아니라 전 세계다. 순수 국내파 젊은이들이 다국적 기업이나 국제기구 등으로 진출해 맹활약하는 경우가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적극성과 창의성에서 해외파에 전혀 밀리지 않는다. 오히려 끈기와 집념, 진취성에서 해외파를 능가하는 경우도 많다.

"요새는 저 같은 한국산 토종이 더 인정받아요."

이희원(27)씨는 작년 6월부터 독일 최대 은행인 도이치방크 홍콩 지사 증권 트레이딩(거래) 파트에서 일하는 한국인이다.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취업 전까지 유학은커녕 어학연수도 가지 않은 순수 토종이다. 여행으로 미국 월스트리트와 홍콩 등지만 한 달가량 다녀왔다.

 외국 기업 뚫은 순수 국내파 젊은 그들… 순수 국내파 젊은이들이 특유의 끈기와 열정으로 세계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다. 지난 6월 도이치방크 홍콩 지사에 취업한 이희원씨는 12월 29일 서울 광화문에서 영자신문과 잡지를 들고 “이 헤드라인을 장식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왼쪽 아래는 일본 에이벡스 그룹 홀딩스에 입사한 원성공씨, 오른쪽 아래는 애플 싱가포르 지사에서 일하는 김현아씨.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원성공씨·김현아씨 제공

그는 홍콩 지사에 일하는 10여명의 한국인 중 유일한 국내파로, 취업한 지 이제 6개월 됐지만 벌써 '에너자이저'라는 별명이 생겼다.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일을 한다는 의미다. 이씨는 "토종 한국인 특유의 끈기와 노력으로 모자란 실력을 채워나가고 동료와 협동하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며 "국내에서 준비해도 글로벌 시장에 충분히 진출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대학 시절 친구들이 대부분 해외 어학연수를 갔지만 국내에 남았다. 대신 경영전략·컨설팅 학회 활동을 하고 외국계 컨설팅 회사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며 실력을 쌓았다. 그는 "'우물 안 개구리로 살지 말자'는 생각이었다"며 "고교 시절부터 영자신문을 읽으며 착실하게 쌓은 영어실력도 자신 있었다"고 했다.

그는 작년 6월 도이치방크 하계 글로벌 인턴 프로그램에 지원해 두 달간 홍콩에서 일을 하다 정규직으로 전환 채용됐다. 이씨는 "세계 시장에서 한국 시장의 중요성이 날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며 "한국인 특유의 끈기와 친화력, 근성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고 했다.

한국산업인력공단에 따르면 공단을 통해 해외에 취업한 한국인 수는 2007년 1548명에서 2009년 1571명, 2010년 2719명, 2011년 3890명으로 최근 크게 늘어나고 있다. 공단을 통하지 않고 직접 해외로 나가는 숫자까지 포함하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김병주 한국산업인력공단 해외취업국장은 "현재 공단에서 체크하는 해외 취업률은 실제 해외 취업률의 60~70%로 보면 된다"며 "순수 국내파는 성실하고, 적극적이며, 창의적이어서 해외에서도 각광받고 있다"고 했다.

김현아(33)씨는 애플사(社) 싱가포르 지사에서 5년째 일하는 한국인이다. 영남외국어대 항공서비스학과를 졸업했고, 취업 전까지 유학이나 어학연수는 물론이고 해외여행도 한번 가보지 않은 순수 토종이다. 그는 오는 2월 팀장으로 승진해 애플의 정책과 한국 시장의 특징을 비교, 분석하는 애플 콘택트센터 한국담당자로 일하게 된다.

그는 2007년까지 한 골프클럽 CEO의 비서로 일했다. 더 넓은 세상에서 일해보고 싶어, 인터넷에서 싱가포르, 두바이, 동남아, 유럽 등의 기업 헤드헌터에 이력서를 보냈다. 그는 "맨땅에 헤딩한다는 한국식 마음가짐으로 일하니 통한다"며 "협동, 정(情), 끈기, 책임감 등 한국적 특성이 세계에서도 인정받는다"고 말했다.

일본 엔터테인먼트 기업 '에이벡스 그룹 홀딩스'에 2009년 2월 입사한 원성공(27)씨도 "오히려 한국 상황을 속속들이 아는 토종이라 더 유리한 측면이 있다"며 "우리가 가진 적극성이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서울대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한 원씨는 대학 시절 1년간 일본에서 교환학생을 하면서 세계를 무대로 일하고 싶다는 결심이 섰다. 인터넷을 통해 취업 정보를 얻었고 2009년 4월 취업에 성공했다. 그는 현재 국제계약과에 근무하며 음반과 영상 저작권과 계약 관련 업무를 본다. 원씨는 "최근 부는 한류 열풍으로 일본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한국은 점차 중요한 키워드가 되고 있다"며 "나 같은 토종 한국인이 해외에서 활약할 기회가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라고 했다.

Posted by Takumi

2012/01/02 11:35 2012/01/02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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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딸 떡볶이' 이경수 사장

목사되려던 이 남자, 떡볶이로 年매출 1200억 올리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이 사내는 목회를 천직으로 알고 자랐고 신학대학원을 나왔다. 대학 때 자신의 피에 사업가 기질이 흐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졸업 후 아버지의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해야 했다. 그러다가 교회에 재정적 위기가 찾아왔다. 교회를 살리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적은 자본으로 할 수 있는 떡볶이집을 동네에 차렸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26㎡(약 8평)짜리 떡볶이집이 전국 850개 매장에서 연 매출 1200억원을 올리는 '떡볶이 기업'으로 성장했다. 지난 7월엔 중국 베이징에도 점포를 냈다. 코웃음은 자제하시길. 삼성은 이병철이 1938년 3만원으로 창업한 '삼성상회'였으며, 현대는 1937년 정주영의 쌀집 '경일상회'로 출발했다.

떡볶이 프랜차이즈 '아딸'의 본사인 오투스페이스 이경수(42) 사장은 자신감과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창업설명회를 하면 오후 1시30분부터 밤 10시까지 쉬지 않고 강연한다더니, 인터뷰가 3시간을 훌쩍 넘겼다. 지난 16일 서울 성내동 그의 회사에서 이 사장을 만났다.

동네 떡볶이집을 연매출 1200억원대 기업으로 키운 오투스페이스 이경수 사장은 창업 이후 한 번도 체인점 모집광고를 내지 않았다. 그는“광고 한 번 내지 않고 1000호점까지 개설하면, 그 자체로 화제가 되고 회사의 자산이 되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사장이 회사 근처‘아딸’매장에서 오랜만에 떡볶이 조리대 앞에 섰다. 동영상 보기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파리바게뜨 옆에 떡볶이집을 차려라"

―점포 위치 선정하는 원칙이 독특하던데요.

"저는 창업주들께 '아파트 입구, 횡단보도 앞, 파리바게뜨 옆'을 추천합니다."

―'파리바게뜨 옆'은 뭡니까.

"파리바게뜨는 전액 포장매출입니다. '아딸'의 목표와 같습니다. 그리고 사는 사람은 어른이지만 누구나 좋아하는 음식이란 공통점도 있습니다."

―파리바게뜨는 되고 뚜레쥬르는 안됩니까.

"(웃으며) 됩니다. 그런데 파리바게뜨 숫자가 훨씬 많습니다. 장사 잘되는 저희 점포를 보면 대개 파리바게뜨 옆입니다. 횡단보도는 동네와 동네를 잇는 다리입니다. 그곳에 사람들이 모이죠. 신호를 기다리면서 건너편 가게들을 보게 되는 이점도 있습니다."

이날 사진을 찍으려고 오투스페이스 본사에서 가까운 '아딸' 둔촌2호점에 들렀다. ―'꿈과 열정'은 식상하게 들리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사업하려면 약아빠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재료도 아끼고 조금씩 속여서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거죠. 저는 정반대로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에서 통닭을 튀겨 팔아도, 그 누가 기름 색깔을 보지 않아도, 내가 정한 원칙대로 정직하게 음식을 만들어 팔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업가는 지극히 도덕적이어야 하고 인격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모든 기업가들이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하죠.

"올봄에 처음으로 세무조사를 받았습니다. 3주를 뒤졌는데 단 한 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조사팀장이 '정말 세금을 100% 다 냈느냐'면서 놀라더라고요. 바닥에 떨어뜨린 떡 하나를 주워서 떡볶이를 만들다가 손님이 그걸 보면 그 가게는 망합니다. 떡 한 개 때문에 말이죠."

'아딸'은 '아버지 튀김 딸 떡볶이'의 준말이다. 이 사장이 2000년 11월 서울 금호동에서 처음 떡볶이집을 열었을 때 그는 1972년부터 경기도 문산에서 튀김집을 해왔던 장인을 금호동 가게로 모셔와 함께 일했다. '아딸'의 아버지는 이 사장의 장인, 딸은 아내인 것이다. 처음 상호는 '자유시간'이었다. 간판 달 돈조차 없었던 그는 직전 가게의 간판 '자유시간 호프'에서 '호프'자를 지웠다. '아딸'은 그가 2002년 4월 이화여대 근처로 가게를 옮겼을 때 지은 이름이다. 장인과 장모는 사위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2004년과 2002년 각각 세상을 떠났다.

―목사가 되려던 사람이 어떻게 분식집을 열었습니까.

"그때 아버지의 교회가 방이동에서 금호동 아파트 상가 지하로 이사를 했습니다. 신축 아파트라 은행에서 분양가의 50%까지 대출을 해준다고 해서 갔는데, 정작 교회라서 대출을 못해준다는 겁니다. 7500만원이 필요한데 주변에서 싹싹 긁어모으니 3500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게 분식집이었습니다."

―그게 소위 '대박'을 낸 것인가요.

"떡볶이는 오랫동안 팔려왔고 다들 좋아하는데 왜 어른들은 사먹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위생 때문이었습니다. 어려서는 지저분해도 아무 생각 없이 먹었는데, 어른이 되면 비위생적인 게 보이거든요. 그래서 늘 깨끗하게 해놓고 유니폼에 요리사 모자를 썼습니다. 계량스푼과 계량컵을 써서 정량화를 시도했죠. 늘 맛이 똑같은 떡볶이를 만든 겁니다. 그때 웰빙 열풍이 불어서, 튀김가루에 허브를 섞었습니다. 식용유도 콩기름, 옥수수기름, 채종유를 가장 맛있는 비율로 섞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른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어요. 가게 주변에 봉제공장이 많았는데 간식으로 사가기 시작하더군요. 떡볶이와 튀김을 6만원어치씩 사갔습니다. 이렇게 하루에 10건만 팔아도 60만원이에요." 요즘 잘 팔리는 튀김집은 거의 예외 없이 튀김가루에 허브를 섞는다. 이 사장은 "그건 우리가 원조"라고 말했다.

지난 7월 4일 개업한 중국 베이징의‘아딸’해외 1호점에서 이 사장과 직원들이 파이팅을 외쳤다. / 오투스페이스 제공
떡볶이로 연 40억대 파는 점주도

전국 '아딸' 매장 중 하루 매출액이 150만~200만원에 이르는 곳도 있다. 150만원으로 잡아도 월 매출 4500만원이다. 그런 점포를 9개나 운영하는 점주도 있다. 이 경우 월 매출은 4억원대로 치솟는다. 떡볶이로 연 매출 48억원이라면 '기업' 말고는 묘사할 단어가 없다. '아딸' 프랜차이즈의 폐점률은 5.6%. 프랜차이즈 업계 최저 수준이다.

전주 출신인 이 사장은 우석대 국문과와 침례신학대학원을 나왔다. 대학원 졸업한 뒤 3년쯤 전도사 생활을 하다가 떡볶이집을 차렸다.

―언제 '장사꾼 기질'을 발견했습니까.

"대학 때 외사촌형 일을 돕게 됐습니다. 그때 형이 건어물 납품을 했는데 교회 한구석을 칸막이로 막아 포장 기계를 들여놓고 건어물을 포장해 팔았어요. 전형적인 가내수공업 형태였죠. 그렇지만 원칙이 있었습니다. 좋은 물건을 남들보다 싸게 판다는 것이었습니다. 전국 특산품 장터 같은 행사장에서 특히 돈을 많이 벌었는데, 하루에 1000만원어치 팔 때도 있었습니다. 열흘간 1억원어치 판 적도 있으니까요. 장사가 너무 재미있어서 학교도 빼먹을 정도였습니다."

―또 어떤 사업을 해봤습니까.

"장사 수완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교인들이 어려울 때마다 저더러 도와달라고 했어요. 방이시장에서 과일장사를 하는 분이 계셨는데 이분은 하루 사과 5상자 파는 분이었습니다. 저는 가락시장에서 사과 100상자를 떼왔습니다. 5상자 파는 것보다 100상자 파는 게 훨씬 쉽습니다. 원가 이하로 밑지고 팔면 됩니다."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건 전형적인 거짓말인데요.

"그게 저의 작전입니다. 재래시장에 오후 5시쯤부터 사람이 몰려서 7시쯤엔 바글바글합니다. 그 두 시간 동안만 밑지고 파는 겁니다. 100원에 사오면 보통 140~150원에 파는데, 저는 80원 받고 팔았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죄다 저한테 몰립니다. 저는 가장 좋은 물건만 떼왔습니다. 싼 데다가 맛도 있는 거죠. 그렇게 두 시간 동안 50박스를 팔아치우고 그다음부터는 120~130원에 팝니다. 이렇게 열흘만 하면, 그때부터 사람들이 다른 가게엔 가지도 않습니다."

―다른 상인들한테서 욕도 먹었겠는데요.

"다른 사장님들이 원가 이하로 팔면 어떡하냐고 따지죠. 저는 '죄송합니다. 저희 작은아버지가 과수원을 하셔서…'라고 했습니다.(웃음) 재래시장에서는 수박도 서른덩이쯤 놓고 파는데, 저는 한 차(車)! 차떼기로 사왔습니다. 한 차 50만원에 떼왔으면, 어떻게 팔든 50만원만 넘기면 되는 겁니다. 50만원어치 팔면 나머지는 전부 밑지고 팔아치웁니다."

―말만 들어도 신나게 장사한 것 같은데요.

"장사엔 '펀(fun)'이 있어야 해요. 어떤 손님은 5000원짜리 3000원에 달라고 합니다. 그럴 땐 '예' 하고 그냥 주지 않습니다. 깎아주려면 명분과 이유가 있어야 돼요. '왜 그렇게 달라고 하느냐'고 물어본 다음에 깎아줍니다. 그 손님은 저를 반드시 기억합니다. 그땐 다들 수박을 작게 잘라서 먹어보고 사갔습니다. 저는 그냥 팔았습니다. 대신 큰 소리로 말합니다. '맛없으면 다시 오세요. 무거운 수박 집에 두고 그냥 오세요. 하나 더 드립니다.' 그래도 기어이 수박 반통을 들고 와서 바꿔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면 소리지르죠. '그냥 오라는데 이걸 왜 들고 왔어요?' 그러면서 더 큰 걸로 한 통 줍니다. 구경하던 사람들 얼굴에 '감동'이 지나갑니다."

이경수 사장은 미용실 인테리어도 혼자 도맡아서 한 적이 있다.“ 나는 국문학과 신학을 전공했지만 전공과 상관없는 일들을 무척 많이 경험했다”며“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큰 즐거움이었다”고 말했다. / 오투스페이스 제공

건어물·과일·수영장·중국집… 손대는 것마다 '대박'

―수영장 사장도 했다면서요.

"대학 4학년 때 건어물로 돈 번 외사촌형이 전화를 했습니다. '너, 꼭 학교 가야 되냐?' 그래서 '안 가도 된다' 했더니 경기도 원당의 수영장을 인수했는데 회원이 700명이래요. 이걸 1200명으로 늘려달랍니다. 근처에 다른 수영장 회원 수가 1200명이었습니다. 형네 수영장은 시설도 낡고 냉난방이 안 좋더라고요. 그래서 '인테리어 새로 해야 된다. 이거 안 하면 나 못한다'고 했죠. 그래서 인테리어부터 싹 다시 했습니다. 과일은 맛, 오징어는 짜지 않은 울릉도 쫄쫄이 오징어, 수영장의 핵심은 물입니다. '물을 얼마 만에 가느냐'고 물으니 갈지 않는답니다. 1년에 한 번도 물을 안 갈아요. 수영장 물 빼고 청소하고 다시 채우는데 2, 3일이 걸려요. 지금도 수영장 수질 알아보려면 '1년에 며칠 쉬느냐' 물어보면 됩니다. 쉬는 날 없으면 물 안 가는 겁니다. 3분의 1씩 갈고 소독약은 계속 넣죠. 수영장에서 넘치는 물도 정수시설을 거쳐 다시 수영장에 들어옵니다. 정수필터 교체하고 1년에 두 번 물을 전부 갈고, 한 달에 한 번 물 3분의 1을 갈았습니다."

―회원이 늘어나던가요.

"아니죠. 살펴보니까 배 나온 중년 강사가 가르치는 반은 회원이 없고 젊은 총각강사 반은 북적북적해요. 50~60대 여자분들도 젊고 잘 생긴 남자를 보면 가슴이 뛴대요. 그래서 키 크고 잘생긴 총각들로 강사를 싹 바꿨습니다. 강사들한테 삼각 수영복 입히고 사진 찍어서 전단을 만들었죠."

―미남계(美男計)군요.

"그 전단을 오후 6시부터 두 시간 동안 근처 아파트 집집마다 붙였습니다. 관리사무소에서 당장 떼라고 전화하더군요. '예, 알겠습니다' 하고 안 뗐습니다. 우리가 안 떼도 주부들이 수영복 남자들 사진보고 다 떼가거든요. 그 다음 날부터 전화가 쏟아지는데, 회원 수가 1500명까지 늘었습니다."

―대학 4학년이면 고작 스물 몇 살일 텐데요.

"강사들이 말을 안 들었죠. 안전요원이 없기에 1시간씩 돌아가며 안전요원을 하라고 했더니 징그럽게 말 안 들어요. 그래서 계좌로 부쳐주던 월급을 현찰로 직접 줬습니다. 월급날 강사들을 일렬로 세우고 "수고하셨습니다" 하면서 월급봉투를 나눠주고 악수를 했습니다. 이게 협박이에요. '내가 월급 주는 사람이다'라는 뜻이죠. 그 다음부터는 말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이 수영장에서 일하던 '미스 리'가 이 사장의 부인 이현경(39)씨다.

―그다음 해본 사업은 뭡니까.

"IMF 때 중국집 사장을 한 6개월 했습니다. 역시 저희 교인 사업이었는데 70평짜리 중국집이 하루 매출 150만원에서 30만원으로 뚝 떨어진 거예요. 제가 오후 3시쯤 갔는데, 사장님과 주방장, 배달원이 모여서 고스톱을 치고 있더라고요. 제가 '화투 다 치우라. 나가서 전단 돌려야지 뭐 하는 거냐'고 호통을 쳤죠. 짜장면을 먹어보니까 맛이 없어요. 월급 250만원짜리 A급 주방장을 내보내고 180만원짜리 B급 주방장을 들였더라고요. 당장 전 주방장 집에 찾아가 두 시간 동안 무릎 꿇고 빌었습니다. 원하는 대로 해드릴 테니 제발 와달라고요."

―주방장이 돌아왔습니까.

"예. 그런데 이 중국집은 문제가 하나둘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테이블 줄이 제멋대로예요. 테이블 줄부터 맞추고 '수저통, 식초, 간장은 항상 테이블 왼쪽 끝에다 놓으라'고 했습니다. 배달원들은 샛노랗게 머리를 염색한 데다 귀고리 달고 껌을 짝짝 씹고 있더라고요. 학교 안 다니는 애들이라 100만원 줄 것 70만원만 줘도 된다고 하더군요. 그런 애들은 배달 가서 '짜장 왔어요!' 소리치고 신발장 앞에 짜장면 내던집니다. 걔들을 불러서 '염색 풀고 귀고리 빼면 월급 30만원 올려준다. 할 수 있겠느냐'고 했죠. 그 길로 나가서 염색 풀고 오더라고요. 그 아이들에게 '배달 가면 인사부터 해라. 보든 안보든 인사해라. 언젠가는 본다. 음식은 꼭 식탁에 올려놓고 오라'고 가르쳤습니다. 고객은 작은 것에 감동하는 법입니다."

―매출이 오르던가요.

"몇 가지를 더 바꿨습니다. 오디오를 사다가 음악을 틀었습니다. 재료도 제일 좋은 걸로 바꿨습니다. 재료를 큼직큼직하게 썰어서 '옛날짜장' 메뉴를 추가하고 전단에다 '옛날 짜장 오셔서 드시면 2500원짜리 2000원!'이라고 썼어요. 70평이나 되는 식당인데 전부 배달이었으니까요. 주방장 바꾸고 좋은 재료를 썼을 뿐인데 손님들은 '역시 옛날짜장이 최고야' 하면서 감탄했습니다. 그다음엔 중고생들한테 전략을 썼습니다. 학생들이 짜장면을 시키면 무조건 곱빼기를 줬어요. 또래집단의 의사소통 속도가 굉장히 빠릅니다. 한 명만 잡으면 반 전체가 와요. 소문이 나니까 오후 3시30분에 중학교 끝나면 식당이 메어터집니다. 5시30분에 고등학교 파하면 또 꽉 찹니다. 그 아이들 짜장면 먹고 갈 때 가게 스티커를 주면, 집에 가서 붙여놓습니다."

―다들 긴축하던 IMF 때 너무 모험적인 시도 아니었습니까.

"그 집 사장님도 걱정이 태산이었어요. 주방장·배달원 월급 올렸지, 재료값 올렸지, 짜장면 값은 내렸지, '도대체 어떻게 할 거냐'고 하더라고요. 거기까지는 쉽습니다. 그다음에 원칙을 지키는 게 어려워요. 그때 원칙을 지키는 게 바로 '추진력'입니다."

"불황은 하늘이 준 기회"

―이른바 '공격 경영'입니까.

"경기가 어려울수록 기회가 좋은 겁니다. 다들 움츠리고 있을 때 제가 벌떡 일어서면 눈에 띄죠. 다들 잘 될 땐 일어서봐야 보이지도 않아요. 저는 '경기가 어렵다? 오케이, 하늘이 준 기회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중국집은 지금도 잘 됩니까.

"아니요. 망했습니다. 6개월간 영업해주고 두 달 뒤에 가보니까 다시 옛날로 돌아가 있더라고요. 테이블은 삐뚤빼뚤, 음악도 안 틀고. 주방장을 또 바꿨더라고요. '성격 더러워서 잘랐다'고 합니다. 내 참, 성격 더러운 사람 달래서 데리고 있는 게 사장의 역할입니다. 자르면 안 됩니다. 사업이 어려울 때, 긍정적인 사람은 매출을 끌어올리려고 하지만 부정적인 사람은 비용을 줄이려고 해요. 그 사장님은 밀가루값 올랐다고 2000원짜리 메뉴도 없앴습니다. 밀가루 한 포에 겨우 몇 백원 올랐는데 말이죠. 그분은 지금도 형편이 좋지 않습니다. 쉽게 절망하고 포기하면 성공 못 합니다. 어떤 분은 근처에 경쟁업체 들어선다는 소문만 듣고도 가게를 내놓습니다. 도전자가 링에 올라오지도 않았는데 기권하는 거죠. 그런 분들은 자기 원칙이 없어요. 남의 말만 듣고 갈팡질팡하다가 퇴직금 전부 날리고 담보대출 받은 것까지 다 털려요. 최악의 경우 자살까지 합니다. 가족 전체가 무너지는 거죠."

―떡볶이 회사로 돈을 많이 벌었습니까.

"체인점이 70개쯤 될 때까지는 저축을 못했습니다. 챙겨야 할 식구가 너무 많았어요. 돈을 벌면 교회 월세부터 냈고, 부모님 생활비와 제 생활비, 남동생 둘의 학비를 대야 했지요(그의 삼형제 중 막내동생은 회사의 이사로 일하고 있고 둘째는 미국에서 신학 공부 중이다). 지금도 큰돈은 벌지 못합니다. 법정 최고액까지 기부를 합니다. 교회에 절반을 헌금하고, 나머지 절반은 여기저기 후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회사는 경기 이천의 보육원인 성애원과 굿네이버스, 전북 완주의 삼례여중 축구부 등을 후원하고 있다.

―성공의 요체가 무엇입니까.

"대형마트 정육코너에서 파를 써는 일을 하게 됐다고 칩시다. 어떤 사람은 이 일이 내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고 파 써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치지만, 어떤 사람은 '어차피 돈 때문에 하는 거니까' 하면서 시계만 봅니다. 후자는 뭘 해도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일에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이 뭘 해도 성공합니다."

이 사장은 "소망이 있다면 내 주변 사람들로부터 '당신과 함께해서 행복했다'는 말을 듣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들로부터는 '당신이 내 아버지여서 행복했다'는 말을, 아내에게서는 '당신이 내 남편이어서 행복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정말 어려울 때부터 함께 해 온 하청업체 사장님들이 10년, 20년 후에 '당신과 함께 일해서 행복했다'고 한다면 원이 없겠습니다. 그분들이야말로 내가 정한 원칙을 믿고 따라와 준 분들이니까요."

그의 사무실엔 책상 두 개와 컴퓨터 두 대가 있었다. 두 책상에 사람이 앉으면 등이 닿을 만큼 좁은 공간이었다. 그의 막내동생인 이준수(38) 이사와 함께 쓰는 방이다. 이 사장에게 "목회를 해도 잘할 것 같다"고 했더니, 그는 "목회를 해야 할 때가 오면 할 것"이라며 "늘 내게 주어진 것에 순종하고 감사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목회를 하면 몇 개월 내에 '스타 목사'가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Posted by Takumi

2011/09/06 23:35 2011/09/06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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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 세기의 승부사 이병철
새 사업 진출땐 90가지 넘는 사항 직접 점검
철저한 '준비 경영'
반대 뚫고 반도체사업, 30년 만에 克日
'창조 경영' 토대 일궈

"기업가는 기업을 구상해 그것을 실현시키고 합리적으로 운영하면서 새로운 기업을 단계적으로 일으켜 나갈 때 더 없는 창조의 기쁨을 느낀다. 그 과정에서의 흥분과 긴장과 보람,그리고 가끔 겪는 좌절감은 기업을 해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

1986년에 펴낸 '호암자전'에서 고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 회장이 밝힌 기업가 상(像)이다. 제일제당,제일모직의 잇따른 성공으로 한국 최고의 거부가 됐음에도 호암의 관심은 돈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20대 후반에 사업의 길로 들어선 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일으켰다.

◆그룹 명운 걸고 반도체 사업 진출


"모두 식당에 모이라고 해." 1982년 3월 미국 샌프란시스코.호암은 미국 방문에 동행한 임직원들을 스탠퍼드 코트 호텔 식당으로 불러모았다.

갑작스러운 호출이었다. 임원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회장의 호출이 반도체 사업 건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업인데 왜 회장은 그리 집착을 하는 것일까"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막대한 자금도 문제지만,일본으로부터 기술을 받는 것이 더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호암은 자리에 앉자마자 전자부문 임직원들의 패배의식부터 질타했다.

도대체 일본을 이기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호통이었다. 호암은 이날 오랫동안 준비해온 결심을 마침내 공식화했다. "세계 시장을 놓고 우리의 위치를 찾아야 한다. 일본을 이길 자신이 있다. 메모리반도체 사업에 진출한다. "

당시 호암의 나이 72세.한 차례 위암수술을 받고 고희를 넘긴 나이였지만 그룹의 명운을 걸고 또다시 일생일대의 도전에 나선 것이다. 젊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해줬던,그리고 항상 배우고자 했던 '선행(先行)의 나라' 일본을 넘어서겠다는 승부수였다.

◆21세기 창조경영으로 승화된 20세기 준비경영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흐른 2010년 1월8일 세계 최대 전자전시회가 열린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CES 현장.호암의 아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은 생애 처음으로 CES를 찾아 내외신 기자들 앞에 섰다. 그리고 "우리는 일본을 넘어섰다. 그들이 쉽게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의 표정에는 '일본을 넘어서라'는 선친의 유지를 현실로 만들어낸 데 대한 자부심이 배어 있는 듯했다.

호암이 타계할 당시 14조원이던 그룹 매출은 지난해 200조원을 넘어섰고,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는 일본 경쟁 업체들을 압도하는 경영실적을 올렸다. 이날 이 전 회장도 "자기 위치를 정확히 쥐고 가야 변화무쌍한 21세기를 견뎌낼 수 있다"며 호암과 비슷한 얘기를 강조했다.

호암이나 이 전 회장이 동시에 언급한 '위치'라는 단어에는 현상에 안주하라는 의미가 아닌,새로운 미래와 비전에 대한 인식과 도전 과제를 정립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무모하게 일을 벌이지 않되,자신의 앞날은 스스로 개척해서 찾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다.

호암의 정신적 유산이 대(代)를 달리해서도 성공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은 기업가 정신을 떠받치고 있는 철저한 준비와 실행전략 덕분이다. 호암이 생전에 손을 댄 사업 중 판단이나 시행착오로 실패한 사업은 하나도 없다. 한국비료의 국가 헌납 같은 경우는 정치적 변수가 빚어낸 돌발적 결말이었다.

호암은 새로운 사업에 진출할 때 90가지가 넘는 사항을 치밀히 점검하고,100% 자신이 없으면 가지 않았다. 전자에 이어 금융 조선 엔지니어링 화학부문이 단기간에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것은 사전에 충분한 시장조사와 내부 역량 점검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21세기 '창조경영'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질주하고 있는 삼성의 글로벌 경영은 한국 최대 역동기를 돌파했던 20세기형 '준비경영'을 기반으로 탄생했다.

조일훈/김용준 기자 jih@hankyung.com

숫자로 본 삼성그룹(2008년말 기준)


매출:191조원
순이익:11조7000억원
총자산:318조원
총투자:27조원
종업원:17만명(해외포함 27만명)
그룹 내 박사수:4865명
계열사:64개
직수출:799억달러
대한민국 전체 수출비중:18.9%
시가총액:192조원
(상장사 전체의 23.2%, 2009년 8월 말 기준)
해외 거점:68개국 477개사무소 및 지법인
월드베스트 제품(세계시장 점유율 기준): 21개

Posted by Takumi

2010/02/01 11:46 2010/02/01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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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타항공그룹 이상직 회장
증권맨으로 출발 37세에 상장기업 인수, 6년 만에 14개 자회사 거느려

<이 기사는 주간조선 2089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소년의 집은 가난했다. 한때 번창했던 아버지의 나전칠기 사업은 기운 지 오래. 경영을 맡은 큰형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소년의 학비는 요구르트 배달을 하던 누나와 학교 선생님이던 작은 형이 번갈아가며 대줬다. 큰형은 숙식을 부담했다. 용돈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명문 전주고를 나왔지만 소년은 늘 궁핍했다. 자존심이 강했던 소년은 그런 현실이 싫었다.

“가난한 사람은 다 가난한 이유가 있는 거야.” 친했던 한 선배가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대학생(동국대 경영학과)이 된 소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라면값이 없을 땐 친구들에게 밥 얻어먹기가 부끄러워 학교를 빼먹던 그였다. 가난이 싫어서 가출도 했었다. ‘먹기 위해’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전전했던 그에게 선배의 말은 ‘가난은 대물림 된다’는 충격적인 얘기로 들렸다.

‘죽어라 아르바이트를 해서 살고 있는데 앞으로도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다니. 그럼,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는 속울음을 쏟아내며 그날 밤을 하얗게 새웠다. 밤 새워 고민해도 선배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더 이상 가난하게 살지 않겠다”

photo 이상선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그는 그날밤 인생의 목표를 새로 세웠다. ‘전공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분야로 나가리라. 그래서 쓰러진 가업을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 20년 뒤의 목표까지 구체적으로 세운 그는 대학 졸업 후 현대증권에 입사, 이름을 날리는 증권분석가가 됐다. 1990년대 IT붐을 맞아 증시에 투자한 돈을 수십 배로 불렸으며 37세의 나이에 상장기업(케이아이씨·플랜트 제조)을 인수한 뒤 6년 만에 회사 규모를 10배로 키웠다. 그가 2007년 10월 저비용항공(low cost carrier)사업에 진출, 2009년 1월 7일 김포~제주행 첫 비행기를 띄웠다. 이렇게 날기 시작한 ‘이스타항공’은 2009년 12월 말레이시아 쿠칭과 일본 고치에 부정기 국제선을 취항시켰고 정확히 1년 만인 2010년 1월 7일 탑승객 100만명을 돌파했다.

“더 이상 가난하게 살지 않겠다”며 주먹으로 눈물을 닦던 소년은 이제 케이아이씨, 삼양감속기(엘리베이터 동력전달기기 제조), 현대종합기계(압력분사기기 제작), 동명통산(자동차 고무부품 제조), 새만금관광개발(부동산개발), 이스타투자자문, 이스타벤처투자, 이스타항공 등 14개 회사를 이끄는 중견 그룹의 회장이 됐다. 이스타항공그룹 이상직(46) 회장은 “2020년까지 매출 10조원, 순익 1조원을 달성, 20대 기업으로 진입하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족쇄

이상직 회장을 만난 것은 지난 1월 4일. 이날은 ‘103년 만에 처음’이란 폭설이 쏟아진 날이었다. 항공사로서는 오래 기억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날, 그를 만난 시각은 한창 붐빌 때인 오후 3시. 하지만 본사가 있는 서울 여의도엔 쏟아진 눈폭탄 때문에 택시 한 대 오가지 않는 기이한 풍경이 벌어졌다.

“서설(瑞雪)이죠. 새해 새 업무를 시작한 첫날 서설이 내렸고 이렇게 인터뷰를 하게 됐으니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있을 겁니다.” 이 회장은 103년 만의 천재(天災)를 상서로운 눈으로 해석하며 싱긋 웃었다. 그는 각진 네모꼴 얼굴에 우뚝 선 콧날을 갖고 있었다. 말투는 느리고 어눌했다. 한눈에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느닷없이 코끼리 얘기를 꺼냈다.

“인도에선 아기 코끼리를 길들일 때 한쪽 발에 족쇄를 채웁니다. 아기 코끼리는 족쇄로부터 벗어나려고 온 힘을 다해 버둥거립니다. 하지만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포기하고 말지요. 그런데 그 코끼리가 성장해 어른이 되면 충분히 족쇄를 부숴버릴 수 있는 힘을 갖습니다. 하지만 ‘족쇄를 벗을 수 없다’는 어렸을 때의 기억 때문에 족쇄를 깨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됩니다. 주인이 주는 건초와 땅콩을 얻어먹으며 대여섯 평밖에 안 되는 공간에서 평생을 보내고 마는 거지요. 심지어 불이 나더라도 코끼리는 족쇄를 부수지 못하고 슬프게 울면서 타죽고 맙니다. 이 코끼리의 운명은 뭘까요. 결국 코끼리의 마음 아닐까요. ‘족쇄를 벗을 수 없다’는 코끼리의 마음이 평생 굴욕적인 삶을 살게 만든 것입니다.”

이 회장은 “인생의 가장 큰 장애물은 부정적인 마음”이라고 했다. ‘난 할 수 없어’란 마음이 스스로의 족쇄가 돼서 성공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처음엔 누구나 아기 코끼리 같습니다. 벗어나려고 수없이 시도하고, 수없이 실패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실패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공으로 가는 길은 의외로 간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성공을 예측하고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이 회장은 “현대그룹 창업자인 정주영 회장을 존경한다”고 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89년 그는 평소의 ‘로망’이던 현대그룹에 지원서를 제출, 제1지망으로 현대증권을 택했다. 동기 2000명 중 20명이 현대증권에 입사했다. “경제적으로 쇠락한 집안에서 모든 것을 해야 할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정한 목표에 가장 빨리 오르는 길은 금융시스템을 배우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당시 증권시장은 주가지수 1000포인트를 찍으며 호황을 달리고 있었다. 억대 연봉자가 속출하면서 ‘1등 신랑감’으로 증권맨이 꼽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신출내기 증권맨에겐 먼 이야기였다. 영업부에 배속된 이 회장은 선배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며 투자 관련 공부를 기초부터 새로 시작했다. 그렇게 내공을 쌓은 뒤 ‘베팅’했다. 증권맨들에게 허용된 근로자주식저축 계좌를 개설한 것이었다.

“증권사 직원들은 주식투자를 하지 못하도록 금지돼 있잖습니까. 그런데 당시 근로자주식저축은 증권맨들도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1300만원을 갖고 투자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2년 뒤에 보니 계좌에 2억원이 들어있는 거예요. 수익률 1540%를 낸 거죠.”

이 회장은 “그때 복리의 개념을 알게 됐다”고 했다. “예를 들어 1년에 2배씩 10년간 수익을 낸다면 단리의 개념이죠. 하지만 복리로 따지면 첫 1년엔 2배로 동일하지만 2년째엔 4배, 3년차엔 8배, 4년 뒤엔 무려 16배로 차이가 벌어지지 않습니까. 이 개념을 적용하면 10배의 성장을 이루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됐습니다.”


워렌 버핏에게 길을 묻다

이 회장은 이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또 다른 승부수를 던졌다. 당시는 유명한 벤처붐이 일던 1990년대 말. 이 회장이 선택한 종목은 벤처의 대명사라 할 만한 ‘엔씨소프트’와 ‘다음’이었다. 벤처 주식으로 “평균 10배가량의 순익을 냈다”는 이 회장은 이렇게 장만한 10배의 이익금으로 ‘프리코스닥’ 종목에 투자했다. 프리코스닥 역시 근로자주식저축과 마찬가지로 증권맨들에게 거래가 허용되었다. 이 회장은 20개 회사에 투자, 그중 2곳에서 또 한 번의 이익을 거뒀다. 그는 어떻게 투자 대상을 족집게처럼 고를 수 있었을까.

이스타항공 ‘스페이스호’의 내부. 우주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워렌 버핏입니다. 그분이 제 마음속의 ‘현인’이에요. 그분을 만나진 못했지만 그분으로부터 투자 철학을 배웠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말했어요. ‘시장의 흐름을 예측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게다가 수급을 예측하며 다른 투자자들의 심리까지 읽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라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모든 주식 뒤엔 회사라는 실체가 있다’는 겁니다. 주식은 그냥 종잇조각이 아니라는 간단한 논리죠. 다시 말해 ‘증시가 없어도 그 회사 주식을 사겠느냐고 물었을 때 사겠다는 대답이 나올 경우엔 그 회사 주식을 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회장은 “버핏의 철학을 배운 뒤 기업의 순자산가치를 우선 순위에 두게 됐다”고 했다. “주식을 사는 것은 그 회사를 사는 것이란 확고한 가치관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으로 시장을 바라보니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개인이나 시장의 심리에 휘둘리지 않게 되더군요. 그렇게 하니까 투자 기법과 투자 마인드가 안정을 찾게 됐고 이는 자연스럽게 장기투자로 이어졌습니다.”

이 회장은 이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2001년 ‘㈜케이아이씨’란 플랜트 전문회사를 인수했다. 이 회사는 제철이나 석유화학 플랜트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상장기업이다. 이 회사 대표이사를 맡았던 그는 회사 규모를 10배로 키워 2007년 8월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두 달 뒤인 그해 10월 ‘이스타항공’을 설립해 항공산업에 뛰어들었다.


10년 뒤 동양최대 항공사를 꿈꾼다

“왜 생소한 분야에 뛰어들었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정 분야가 성장할 것이란 판단이 들면, 저는 덤벼듭니다. 익숙한 분야냐 아니냐 하는 것보다 전체적인 트렌드가 어느 분야로 가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결정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리더는 책임지겠다는 의지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리더 자리를 내놔야 합니다.” 이 회장이 말을 이었다. “독과점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기존의 대형 항공사들은 이미 포화상태입니다. 서비스·관광수요가 늘면 늘수록 트렌드는 저비용항공사가 될 것입니다. 외국의 경우를 봐도 그렇습니다. 미국, 유럽 모두 저비용항공사가 주요 시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동북아시아는 전체 동양시장의 6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엔 당시 제주항공(2006년 취항)과 한성항공(2008년 운항중단) 외엔 저비용항공이 없었어요. 그래서 투자를 결심했습니다.”

이 회장은 프로펠러기가 주를 이뤘던 저비용항공 시장에 과감하게 보잉737기를 도입했다. 자동항법장치를 갖춘 신기종이었다. “항공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입니다. 사실 프로펠러기가 반드시 덜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는데, 바람이 불면 롤링(rolling)이 심해서 사람들이 의외로 불안해 하더라고요. 그래서 보잉737을 도입했습니다. 승무원 유니폼은 서울 동대문 시장에서 주문제작했습니다. 비용을 조금이라도 줄여서 보다 싼값에 항공티켓을 판매하려 한 것입니다.”

이스타항공 김포~제주 간 가장 싼 요금은 편도 1만9900원. 요금체계는 8단계로 다양하지만 가장 비싼 것도 6만9900원에 불과하다. 이 회장은 여기에 아이디어 하나를 추가했다. ‘추억’을 선물하자는 것이었다.

“우리 회사의 각 항공기마다 스카이, 우주선, 어린왕자, 크루즈, 타임머신 등의 별명을 붙이고 그에 맞는 인테리어를 갖췄습니다. 예를 들어 스카이호의 천장엔 하늘과 구름이 그려져 있고 어린왕자호엔 칼을 찬 어린왕자가 승객을 향해 웃고 있습니다. 우주선호를 타시면 스페이스 셔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죠. 그리고 승무원이 승객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어드립니다. 승객들은 이스타항공을 타실 때마다 ‘새롭다, 재미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비행 자체가 추억이 되는 거죠.”

독특한 서비스와 파격적인 가격의 결과는 수치로 나타났다. 2009년 1월 7일 김포~제주 노선에 취항한 지 정확히 1년 만인 지난 1월 7일 탑승객 100만명을 돌파한 것이다. “항공 산업은 초기투자가 많이 듭니다. 항공기를 마련하고, 사람을 뽑고, 승무원을 훈련시키는 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보통 이 기간을 3년으로 잡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2년차인 올해부터 흑자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0년 뒤인 2020년엔 동양 최대의 항공사로 이스타항공을 키울 것입니다.”

가난이 싫다며 울던 소년이 사회생활 20년 만에 “2020년 20대 그룹에 진입하겠다”며 포효하고 있었다.

Posted by Takumi

2010/01/17 17:51 2010/01/17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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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이미지의 탤런트 선우재덕 스게티 사장은 20년차 사업가다. 그의 사업경력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제1기는 장사를 했던 1990~2002년까지다. 1990년 서울 성신여대 앞에 떡볶이 전문점을 열었는데 매장을 카페처럼 멋지게 꾸민 아이디어가 통해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어느 날 친누나가 제안해 떡볶이 전문점을 정리하고 1998년에 광릉수목원 근처에서 카페를 시작했다. 이 사업도 잘 됐지만 선우 사장이 바빠지면서 몇 년 후 누나에게 넘겼다. 제2기는 그가 장사 차원을 넘어 기업을 경영한 시기다. 2003년 8월부터 현재까지다. 지금의 ‘CEO’ 선우 사장을 만든 경험의 8할은 바로 이 시기의 몫이다.

2003년 8월 그는 후배와 함께 중저가 스파게티 프랜차이즈 ‘스게티’를 설립했다. 처음에는 보통 연예인들처럼 초상권 제공, 마케팅 협력 정도만 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2004년에 선우 사장은 후배의 지분을 모두 인수했다.

“후배와 저의 회사 경영 방침이 잘 안 맞았어요. 저는 가맹점과 본사가 같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후배는 본사 위주로 영업을 하려고 해서 충돌이 잦았습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대개 연예인 쪽에서 손을 떼기 마련이다. 하지만 선우 사장은 거꾸로였다. 후배에게 “내가 회사를 맡겠다”고 제의, 아예 본격적으로 사업에 나섰다. 과거에 떡볶이 전문점과 카페 사업 성공 경험이 있던 터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인수를 하고 보니, 황당하게도 회사의 재무상태가 엉망이었다. 그가 모르던 빚도 상당했다. “인수할 당시에 그런 것도 확인을 안했으니 정말 준비 없이 시작한 거죠.”

하지만 초반에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해 매장 수가 빠르게 불어났다. 매장 수가 가장 많았던 2006년에는 최대 35개의 매장이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후 사업이 꺾이기 시작했다.

“경기가 나빠지며 사업 환경이 어려워졌어요. 그리고 스게티가 공략했던 시장이 생각과 달리 잘 열리지 않았습니다.”

스게티는 5000원대 스파게티로 대중화한다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경제력 있는 소비자들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파게티를 먹고, 일반인들은 김밥, 라면 같이 아예 저렴한 음식을 선호하더라고요.” 5000원대 스파게티는 타깃 지점이 애매했던 것이다.

스게티에도 물론 장점이 있었다. 본사에서 반조리한 음식을 공급하기 때문에 조리사를 고용하지 않아도 음식을 만들 수 있어서였다. 가맹점들로서는 상당한 인건비 절약 요소인 것. 하지만 기본적인 고정비 리스크는 어쩔 수 없었다. 스게티의 식자재를 전부 이탈리아에서 수입했고, 일반 건물에 입점한 가맹점의 경우 매장 임대료와 인건비 등은 낮추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불경기에다 시장이 잘 형성되지 않자 견디지 못한 가맹점들이 하나둘 문을 닫았다. 현재 스게티 매장은 전국에 22개가 남아 있다.

“일반 매장은 많이 없어졌는데, 할인점이나 백화점의 푸드코트에 들어간 매장들은 거의 살아남았어요. 푸드코트는 대부분 일정 수 이상의 유동인구를 확보하고 있고, 인테리어비 등도 거의 들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환경이더군요.”

관련 사업을 연구하다 홈쇼핑 시장을 개척, 포장 제품 공급도 하고 있다. 면과 소스를 30초만 데우면 바로 먹을 수 있는 제품으로, 회사 전체 매출의 10~15% 정도를 차지해 비중도 작지 않다. 선우 사장은 이제 한계가 있는 중저가 스파게티 사업의 확장 대신, 다른 식당 체인을 구상하고 있다. 그는 2007년 12월 분당에 한우전문 식당 ‘선우랑한우랑’을 직영으로 열고, 이 시장을 경험 중이다. 처음에는 한우구이 전문점 프랜차이즈를 생각했는데, 2년쯤 운영한 지금은 방향을 약간 바꾸려고 한다.

“한우구이 식당은 리스크가 꽤 큰 사업 같아요. 믿을 만한 공급처 찾기도 어렵고, 투자비도 많이 들거든요. 한우 가격이 너무 많이 올라서 원가를 맞추기도 쉬운 게 아니고요.”

대신, 그는 설렁탕·갈비탕·국밥·된장찌개 등 점심시간에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한우 관련 메뉴 위주의 체인은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생존한 스게티 매장의 경험을 살려 푸드코트 위주로 출점할 생각이다.

스게티 본사 실적은 가맹점이 최대 수준이던 2006년 이후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지난 2008년 매출은 17억원, 영업적자와 순적자가 각각 3억원이었다. 2007년과 매출은 비슷했지만 영업적자 규모가 9000만원에서 3배 이상 확대됐다. 하지만 선우 사장은 2009년 결산을 앞둔 지금은 “실적이 바닥을 찬 것 같다”며 희망찬 미소를 지었다.

수산물 유통으로 돌파구 마련

선우 사장의 명함에는 ‘대표 선우재덕’이라는 글씨와 함께 회사명이 두 개 적혀 있다. 하나는 스게티, 다른 하나는 새벽통상이다. 새벽통상은 새우살, 꽃게 등 냉동 수산물을 수입하는 회사다. 새벽통상이 수입한 냉동 수산물을 스게티가 웨딩홀, 호텔 등 국내 시장에 공급하고 있다. 2008년 초부터 매출원 다변화 차원에서 시도했다. 스게티 실적의 반등을 이 냉동 수산물 유통 사업이 이끌고 있다고 한다.

“수산물 유통 사업이 다행히 잘 되고 있어요. 프리마호텔 등 큰 계약처를 여러 곳 잡았고, 2010년에는 거래처를 더 늘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익 규모도 괜찮아서 2009년 매출은 더 커지고, 적자는 줄어들 것으로 예상합니다.”

선우 사장은 그 외에도 돌파구를 찾기 위해 부지런히 일하고 있다. 2009년 들어 일본에 경북 상주 막걸리를 공급하는 사업권을 땄고, 또 분당 수내동에 ‘선우와사케와’라는 직영 사케(일본 술)바도 새로 열었다. 사케바 역시 경험을 쌓은 후 나중에 체인화를 시도할 생각이다.

6년차 식당 프랜차이즈 CEO가 된 선우 사장은 이제 뭣 모르고 스게티를 인수했던 그 시절과 사뭇 달라졌다. 2004년에 스게티를 완전히 인수한 후 몸으로 부딪혀 익힌 경영의 교훈이다. 지금까지 월급도 없이 하루에 4~5시간 자면서 묵묵히 일해 왔다.
“전에는 투자비만 맞춘 사람들이면 그냥 가맹점을 내줬는데, 그런 분들 중에 경영마인드나 성실성 부족으로 못 버티는 경우가 많더군요. 앞으로는 가맹점 계약을 할 때 열심히 장사를 하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는 분들 위주로 가맹점주를 엄격하게 선정할 생각입니다.”

Posted by Takumi

2010/01/17 10:48 2010/01/17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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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모리 시게노부 일본전산 사장

이 사람은 '魂'을 가졌다

블룸버그

<일본전산 이야기>주인공 나가모리 일본전산 사장 인터뷰

난관에 부딪혀 앞이 캄캄할 때, 남들에 비해 내가 가진 조건이 다 불리해 보일 때…. 이럴 때 이 사람의 이야기에 한번 귀를 기울여 보면 어떨까?

이 사람과 1시간 30분의 인터뷰를 마쳤을 때 기자는 지치기는커녕 마치 힘이 나는 약을 먹은 느낌이었다. 그는 지상 최고의 모티베이터였다.


일본전산(日本電産)의 나가모리 시게노부(永守重信·65·사진)사장. 이 사람의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한다. 한국에서도 그랬다. 그의 성공 스토리를 엮은 책 〈일본전산 이야기〉는 올 초에 나와 지금까지 30만부가 팔렸고, 삼성경제연구소는 'CEO들이 여름휴가 때 읽을 책 20권' 중 하나로 꼽았다.

그는 일본에서 가장 열정적인 경영자로 꼽힌다. 1973년 가정집 한 귀퉁이 창고에서 전기 모터 회사를 창업해 지금은 140여개 계열사에 13만명의 종업원, 매출 약 8조원의 그룹을 일궈냈다. 일본판 벤처 신화이다. 게다가 국내외 27개 회사를 인수합병(M&A)한 뒤 모두 경영을 정상화시켜 '기업 재생의 신(神)'으로 불린다.

그렇다고는 해도 일본 재계 랭킹 100위권 밖의 중견 기업. 그런데도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은 그의 이야기에 통쾌한 역전이 있고, 가슴 뛰게 하는 꿈이 있기 때문이다.

나가모리 사장은 스스로를 '헨진(變人·이상한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괴짜 경영인이다. 그는 정형(定型)과 겸양이 미덕인 일본 사회에서 기행(奇行)과 파격(破格)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파격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다. 벤처기업이 도쿄 식(式)을 그대로 따라 해서는 도쿄의 대기업에 승산이 전혀 없었기에 그는 의도적으로 도쿄식을 거슬렀다. "다른 사람을 흉내 내는 것은 경영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래서 창안한 것 중 하나가 밥 빨리 먹고, 목소리 큰 순서대로 뽑는, 기발한 신입사원 공채 시험이었다.

그와의 만남은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일본전산 교토 본사 20층에 있는 그를 만나러 엘리베이터를 탔더니 4면이 모두 녹색이었다. 다무라 홍보부장은 나가모리 사장이 녹색에 대한 고다와리(특정한 것에 대한 마니아적 집착을 나타내는 일본어)가 있다고 귀띔했다.

과연 그는 녹색 넥타이에 녹색 행커치프 차림으로 나타났다. "왜 녹색인가" 물으니 그는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보여준다. 역시 녹색. 소매를 걷으니 드레스셔츠의 커프스버튼까지 녹색이다.

"구성술(九星術-점성술의 일종)에 따르면 저는 흙(土)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해요. 흙은 식물, 즉 녹색이 없으면 썩어 버리죠. 그래서 녹색입니다. 녹색 넥타이가 1000개가 넘어요. 그리고 식물을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태양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책상을 남쪽이나 동쪽에 둡니다. 회사도 반드시 남향 아니면 동향입니다. 곳곳에 사옥이 있고, 공장이 있는데 다 그래요. 그런데 도산한 기업을 인수한 뒤 가보면 공교롭게도 대개 북향 아니면 서향이에요."

늘 밝고, 기운찬 것을 좋아하는 것도 그의 고다와리다. 사옥 1층엔 6개의 그림이 벽에 걸려 있었는데, 모두 해바라기였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엔 일곱 마리의 말이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달려가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많은 사람이 나가모리 사장에게 고속성장의 비결을 묻는다. 그런데 그 대답이 우스울 만큼 간단하다. "남들보다 두 배 일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전산의 행동 지침은 이렇다. '즉시 한다. 반드시 한다. 될 때까지 한다.'


창조경영을 논하고, 서번트 리더십을 이야기하는 시대에 무모하다고 할 만큼 '전근대적'인 경영 철학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다른 길이 없었다고 했다. "36년 전 창업했을 때 우리 경쟁 상대는 세계와 일본을 대표하는 대기업이었습니다. 그들에 이기기 위해서는 흙탕물 마시며 두 배 일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일본전산의 핵심 가치인 '정열(情熱), 열의(熱意), 집념(執念)'을 나가모리 사장이 자필로 썼다.

일본전산의 핵심 가치는 '정열, 열의, 집념'이다. 나가모리 사장의 정열은 짧은 인터뷰 시간에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억양이 센 오사카변(사투리)을 쓰는 그는 목소리 크기도, 말하는 속도도, 대화에 몰입하는 정도도 다른 사람의 두 배는 되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 사장님 책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왜 한국 CEO들이 사장님 이야기에 열광할까요?

"몇 달 전 한국에 갔더니 호텔 종업원들이 저마다 제 책을 들고 와서 사인을 해달라고 하더군요. 사장님이 읽고 감상문을 써내라고 했다면서요. 일본도 30년 전만 해도 저 같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마쓰시다 고노스케나 모리타 아키오 같은 분들이죠. 그런데 요즘 일본 사람들은 '남들 두 배 일하라' 이런 말 하면 '힘들다', '괴롭다', '이젠 인생을 좀 즐길 때 아니냐'고 해요. 하지만 한국에는 성공하겠다는 의지가 강한 분들이 아직 많은 것 같아요. '일본을 따라잡고, 일본을 앞지르려면 일본에서 성공한 것을 다 따라 배우자'고 말하는 사람이. 그래서 제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습니다."

 
▲ 나가모리 사장은 녹색을 좋아한다. 넥타이도, 지갑도, 행커치프도, 드레스셔츠의 커프스버튼도 모두 녹색이다. / 마이니치 제공 ■능력의 차이는 5배, 의식의 차이는 100배

일본전산을 이야기하는데 빠뜨릴 수 없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나가모리 사장이 창업 초기 신입사원 공채를 시작했는데, 인재가 오지 않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그의 장인이 지나가는 말처럼 "군대 생활해보니 밥 빨리 먹고, 목욕 빨리하고, 용변 빨리 보는 사람이 일도 잘하더라"고 말했다.

나가모리 사장은 1978년 '밥 빨리 먹기 시험'을 실행에 옮긴다. 160명의 응시자 중 서류와 면접으로 절반 정도를 거른 뒤 남은 전원에게 도시락을 나눠줬다. 그리고 가장 빨리 먹은 사람 순서대로 서른세 명을 무조건 합격시켰다. 커트라인은 15분이었다. 떨어진 사람들은 "무슨 이런 시험이 있느냐"고 아우성쳤고, 지역 언론은 "한심한 회사"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그 뒤에도 '큰소리로 말하기' 시험, '화장실 청소' 시험, '오래 달리기' 시험과 같은, 일본전산만의 시험을 고집했다.

"저도 원래는 도쿄대나 교토대 출신의 머리 좋은 사람을 뽑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중소기업엔 그런 인재가 좀처럼 오지 않습니다. 밥 빨리 먹기 시험은, 명문대 출신은 아니지만 잠재 능력이 큰 사람을 뽑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밥 빨리 먹기 시험이야말로 어느 입사시험보다도 효과 만점이었다"고 덧붙였다. "일본전산에서 세계적 발명이 나오고, 세계 챔피언이 됐는데 그것을 누가 만들었을까요? 그게 바로 그때 밥 빨리 먹고 목소리 커서 뽑힌 사람들이었어요."

범재(凡才)를 천재(天才)로 만드는 데 나가모리 사장만의 리더십과 동기 부여법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능력의 개인 차는 아무리 커도 5배를 넘지 않지만, 의식의 차이는 100배의 격차를 낳는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출중한 능력을 가진 사람보다 평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뽑아 그들의 하려는 의욕을 높이는데 전력을 기울이는 것, 이것이 그가 말하는 고속성장의 비결이다.

그가 무조건 두 배 일하라고 다그치기만 했다면 직원들이 그를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겐 전혀 다른 면모도 있었다. 결코 스펙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실패한 직원에게 점수를 더 주며, 부하에게 호통을 친 뒤에 뒤끝은커녕 두 배의 배려를 기울인다. 다른 기업을 인수하면 단 한 명의 구조조정도 하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두 배 일하게 만드는 그의 노하우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요즘도 밥 빨리 먹고, 목소리 큰 사람 뽑습니까?

"지금은 밥을 먹게 한다든지 그런 일 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을 금방 알 수 있어요. 수십 년 데이터가 쌓여 있기 때문에 어떤 질문을 해서 어떤 대답을 하면 합격, 어떤 대답을 하면 불합격, 이런 게 시스템으로 돼 있습니다. 노하우지요. 기본적으로는 요즘 사람들이 예전처럼 '경쟁에서 이기자'는 정신이나 정열, 열의, 집념 이런 게 부족하니 그런 사람을 어떻게 뽑는가 하는 노하우입니다. 수천 가지의 노하우가 있습니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예전에 "한 사람의 천재가 1만명을 먹여 살린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저는 늘 '한 사람의 100보(步)보다 100사람의 1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천재보다 100사람의 1보가 낫다는 것이죠. 100보라고 해도 100사람이 한다면 한 사람에 1보밖에 안 됩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100보는 힘든 일이니까요."

―이건희 회장과는 반대군요?

"완전히 반대입니다. 한 사람의 천재가 1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건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일본에서도 수백 년 전엔 그렇게들 말했어요. 나라 전체의 수준이 크게 뒤떨어져 있을 때는 그것을 단기간에 끌어올리려면 천재가 필요합니다. 한국도 그런 생각에서 삼성이나 LG 같은 대기업이 나왔을 것이고요. 일본도 전전(戰前)에 그랬습니다. 재벌이 이끌고 갔죠. 하지만 지금은 다른 것 같습니다. 이제는 한국도 출중한 나라가 됐기 때문에 생각을 바꿔 나가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한국 중소기업의 성장이 더딘 이유가 그런 데도 있습니다."

 ■일이 즐거우니 두 배 일한다

남보다 두 배 일한다는 그의 사고방식은 그의 모친에서 비롯됐다. 그가 월급쟁이를 그만두고 창업을 한다고 했을 때 모친은 그를 거듭 말렸다. 그래도 그가 뜻을 굽히지 않자 모친은 그에게 한 가지를 조건으로 허락했다. 바로 "늘 다른 사람의 두 배를 일하겠다는 약속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가모리 사장은 농사꾼 집안의 6남매 중 막내였다. 남편을 일찍 사별한 모친은 아침엔 남보다 일찍 밭에 나가고, 밤엔 가장 늦게 귀가하는 '두 배 일하기'로 많은 전답을 사 모았다.

―한국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 열심히 하는 사람 못 이기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 못 이긴다.' 사원들에게 두 배 일하라고 하지 않아도, 즐기며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면 저절로 두 배 일하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을 실천한 것이 바로 일본전산입니다. 30~40년 전만 해도 일할 데가 없으니 힘들어도 열심히 일했죠. 하지만 요즘은 능력 있는 사람은 어디 가서도 일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왜 여기서 일 하나? 일을 즐기기 때문입니다. 저만 해도 그래요. 저는 돈이 많습니다. 그런데 왜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서 밤까지 일하나요? 일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일본전산엔 회사를 키우는 즐거움, 새로운 회사를 만들고, 다른 기업을 인수해서 키우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미국의 구글 같은 회사는 일을 즐기라고 해서 회사를 마치 놀이동산처럼 만들었다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일이 끝나면 집에 가서도 일하지만, 일본 사람들은 퇴근하면 술집으로 갑니다. 노동의 질이 다릅니다. 그런 사람들과 경쟁하려면 두 배 일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논다는 게 그래요. 매일 일하다 조금 쉬면 재미있지만, 매일 놀면 재미가 없어요.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푼다고 술 마시고, 파친코에 가고, 영화를 보고 합니다만, 그렇게 풀리는 스트레스라면 진짜 스트레스가 아닙니다. 작은 스트레스이죠. 진짜 스트레스는 일 스트레스이고, 그것은 일로 성공해야 비로소 풀립니다."

(나중에 다무라 홍보부장은 두 배 일하라는 것이 무조건 '오래' 일하라는 것과는 구별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즉 일본전산의 하드워킹이란 '지적 하드워킹'을 말한다는 것이다. 생각으로 일하는 것, 일을 쉬고 있을 때나 무의식중에도 일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의미한다. )

■경제위기 이후 매출이 반으로 줄어도 이익을 내는 발본적 개혁 시동

―100년 만에 최대의 경제위기라고 합니다. 사장님에게도 그랬나요?

"창업 후 36년 동안 이런 일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작년 말 리먼 브러더스 쇼크 이후 순간적으로 매출이 예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어요. 우리 같은 제조업체는 보통 매출이 30% 줄면 적자를 보게 됩니다. 시뮬레이션을 해보니 매월 100억엔씩 적자를 보는 것으로 나와요. 그래서 어떻게 적자를 면할까 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1930년대 미국 대공황 때도 성공한 기업들이 있었는데 그런 기업의 성공 비결에 관한 책도 읽었습니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매출이 반으로 줄어도 이익을 내는 구조로 바꿔야 하겠다. 그러면 매출이 70%로 회복되면 이익이 예년 수준으로 회복되고, 매출이 100% 회복되면 이익이 두 배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시작한 게 'WPR'입니다."

―WPR요?

"예. 'double profit ratio'의 약자입니다. (다무라 홍보부장은 'DPR'로 줄일 수도 있지만, 말하기 편하게 'WPR'로 했다고 설명했다.) 어떻게 하면 매출이 줄어도 이익을 낼 수 있을까, 이것을 전사적으로 검토했는데, 그랬더니 수만 건의 개선 항목이 나왔습니다. 그것을 묶어서 사내 매뉴얼도 만들었어요. 생산성을 배가하고, 운영을 재편하고, 신사업을 개척하는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그동안 잔업 4시간을 해서 하던 일을 잔업 없이 정시에 끝내자, 쓸데없는 회의는 없을까 같은 것도 철저히 검증하자, 그리고 하청기업 선정도 그룹 차원에서 통일 기준을 만들어 계열사에 지시했습니다. 다행히 매출이 아직 100%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았는데도, 내년 3월 결산기의 이익률은 사상 최고치를 달성할 것 같습니다."

―잔업 4시간으로 하던 일을 정시에 끝내다니, 마치 마른걸레를 다시 짜자는 것처럼 들립니다. 일본전산 같은 회사에서 직원에게 더 짜낼 게 남아 있습니까?

"마른걸레 짜는 것, 그런 일 저희는 안 해요. (웃음) 그런 도요타식 구식 합리화가 아닙니다. 그렇게 사원을 쥐어짜는 식으로는 위기 극복이 불가능합니다. 비유하자면 걸레로 청소하던 것을 전동청소기로 바꾸는, 그런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할까요? 걸레로 10시간 걸리던 것을 전동청소기로 1~2시간에 끝내는 거죠. '정시에 퇴근해라. 그리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일해라. 잔업 수당이 없어지니 곤란하겠지만, WPR로 수익을 내서 돌려주겠다.' 이런 것이 WPR의 요체입니다. 마른걸레 짜는 회사들은 직원들 목을 잘랐지만, 우리는 한 명도 감원하지 않았어요. 그런 식으론 결코 위기에서 탈출할 수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입니까?

"누구나 궁금해하고 있지만, 노하우니까 공개할 수는 없어요."

 
▲ 나가모리 사장은 말할 때 제스처를 많이 썼다. 그는 대학 시절 대학신문 편집장과 변론부 활동을 한 것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오른쪽은 이지훈 위클리비즈 에디터. / 일본전산 제공 ■부실기업 살리는 비결은 사원들의 병든 의식 고치는 것

나가모리 사장은 끊임없는 M&A를 통해 회사를 확장해 왔다. 그는 27개의 기업을 인수한 뒤 모두 흑자로 돌려놓았다. 그것도 한 명의 구조조정도 없이.

―부실기업을 살리는 비결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사원의 의식 개혁입니다. 부실기업의 특징은 사원들의 의식이 병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회사가 망하는 것은 아닐까', '월급 못 받는 것은 아닐까' 이런 불안감 때문에 일하려는 의욕이 꺾이게 됩니다. 일본전산보다 큰 기업, 역사가 긴 기업, 기술이 뛰어난 기업도 경영이 어려워지는 이유는 사원들의 의욕이 꺾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되돌리는 것이 바로 경영자의 일입니다. 사원들의 병든 의식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바꾸는 것이죠."

나가모리 사장의 부실기업 경영 정상화 방식은 철저히 현장 중심적이다. 지난 2003년 나가노현의 산쿄정기(三協精機)를 인수한 뒤 그는 매주 2박3일씩 출장을 갔다. 400㎞ 거리다. 그리고 작업복에 작업모를 쓰고 공장을 돌아다녔다. 2004년 9월까지 12개월 동안 일반사원-주임급 사원과 52회, 과장 이상 관리직과는 25회의 간담회를 가졌다. 가장 먼저 당부한 일이 자발적으로 10분 일찍 출근해 회사를 깨끗이 청소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사원의 의식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이 출근 시간과 직장의 정리정돈, 그리고 전화 응대라고 말한다. 그는 의식 개혁을 위해 항상 '6S'를 강조한다. 정리, 정돈, 청결, 청소, 단정, 예의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그 여섯 가지만 잘하면 경영이 정상화되나요?

"전화는 엉망으로 받고, 사원은 지각하고, 공장은 더럽고, 이런 회사 중에 실적 좋은 회사가 있으면 알려 주세요. 사실 6S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내가 경영 정상화를 하러 가보면 그것을 못하고 있어요. 그것을 할 수 있게 되면 점점 수익이 나기 시작하죠."

―오늘 하루 일과를 소개해 주십시오.

"오전 5시50분에 일어나서 아침 먹고 6시50분에 출근했습니다. 그리고 30분 동안 경비에 관한 전표를 봅니다. 그리고 전화를 하고 회의를 하고. 점심은 10분 만에 먹습니다."

―10분요? 저녁도 10분입니까?

"저녁은 20분입니다. (웃음) 아침은 5분이고요. 그러니 5분-10분-20분입니다. 양은 많이 먹지만, 먹는 속도가 빠릅니다. 저는 365일, 휴가도 없이 일합니다. 쉬는 것은 설날 오전뿐입니다. 술도 끊었고, 담배도 피우지 않습니다."

―인생에 유일한 낙이 일입니까?

"일하는 것은 힘듭니다. 일 자체가 즐겁다기보다 일한 결과가 나오니 즐거운 것입니다. 처음에 이 방과 비슷한 크기의 공장에서 시작했는데, 36년간 계속 성장하고, 사회에 공헌하고, 세계에 진출하고 이런 것이 다 즐거운 것 아닌가요?"

■직원들에게 1주일에 1000통의 이메일을 보낸다

―사장이 아니었다면 어떤 일을 했을 것 같습니까?

"제가 하고 싶었던 게 세 가지 있었습니다. 첫째 야쿠자의 두목, 둘째 노동조합 위원장, 그리고 셋째가 사장입니다. 공통점은 많은 사람을 움직이는 일, 강한 리더십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야쿠자 두목은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사회는 물론 가족들도 기피하는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마음을 움직여야 하니까요."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면 교세라그룹 창업자인 이나모리 가즈오 명예회장과 생각이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두 분 다 이른바 '교토식 경영'을 상징하는 인물이신데,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사장님께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그리고 그와는 어떤 사이입니까?

"이나모리 회장이 저보다 12살 위인데, 공통점이 3가지 있습니다. 첫째, 열심히 일하고, 둘째, 미래의 꿈을 보는 소년이었고, 셋째, 삼류대학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나가모리 사장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장학금을 많이 주는 직업훈련대학교 전기과를 졸업했다.) 20년 전부터 알고 지냈는데, 제가 많이 배웠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그 양반과 식사를 같이하면, 저와 닮은 점이 있어요. 식사가 끝나면 둘 다 집에 안 가고 회사로 돌아갑니다. 노력가라는 것이죠. 교토의 기업들을 보면 CEO들이 모두 유니크한 사람들이에요. 헨진(變人)이죠. 그런데 경영은 흉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교토)는 창업자가 많은 곳입니다. 도쿄나 오사카는 샐러리맨투성이지만."

―대학 시절 대학신문 편집장을 지냈는데, 신문 만들어본 경험이 경영에 도움이 됐나요?

"경영자가 사람을 움직이려면 마음을 전하는 말과 문장을 써야 합니다. 일반적인 내용이 아니라 자신이 아니라면 누구도 쓸 수 없는 그런 글을 써야 하는데, 편집장 경험이 많이 도움이 됐습니다. 대학 시절에 또 변론부 활동도 했는데, 사람을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나가모리 사장은 사원들에게 이메일을 많이 보낸다. 1주일에 보통 1000통을 보낸다. 출장 가기 위해 신칸센(新幹線)을 탈 때도 계속 이메일을 쓴다. '자네, 그건 틀린 것 같아', '잘했어', '이런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이런 내용이다.

"인간에게 모티베이션이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은 3일, 경영자라고 해도 2~3개월 정도죠. 따라서 다른 사람이 계속해서 동기를 부여해 주지 않으면 90%의 사람은 열심히 일하려는 의욕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원들의 일하려는 의욕을 높이기 위해 이메일을 보냅니다."

인터뷰를 시작한 뒤 어느덧 약속했던 1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오늘의 인터뷰를 즐기는 것 같았다.

■한국, 삼성·LG·현대 셋만으로는 꿈이 없다

―한국 기업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본 기업과는 어떻게 다릅니까?

"한국 기업의 발전은 눈부십니다. 하지만, 한국엔 삼성과 LG, 현대 이렇게 셋밖에 없어요. 미국, 일본엔 수백 개인데, 한국엔 셋뿐이에요. 이래서는 젊은이들에게 꿈이 없어요. 이게 일본과의 차이입니다. 한국이 진짜 강해지려면 중소기업, 벤처기업도 대기업으로 클 수 있는 나라, 그래서 대기업에 못 들어가는 젊은이에게도 찬스를 주는 나라가 돼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의 일본 추월도 가능합니다.

일본도 전후(戰後)에 소니나 혼다, 교세라 같은 기업들이 생겨났죠. 이런 게 안 생기면 진정한 의미에서 강한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일할 의욕이 생길까요? 한국이 잘되려면 온실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아니라 흙탕물 먹으며 고난을 이겨내는 창업자가 많아야 합니다. 선택지가 많아야 하는데, 한국엔 선택지가 극단적으로 좁아요. 공부 열심히 해서 가는 데가 삼성, LG, 현대뿐이라면 세상이 재미없지 않아요? 대기업에 입사하는 사람은 만족해도 대기업에 못 들어가는 젊은이는 희망이 없어요. 바로 이런 점도 한국에서 제 책이 잘 팔리는 이유 중 하나일 겁니다. 저 같은 삼류 대학 출신, 밑바닥에서부터 출발하는 사람에게도 꿈을 주니까요."

나가모리 사장은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인기 강사이기도 하다. 그가 쓴 〈사람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라〉는 책에 '정열, 열의, 집념'을 자필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신문에 실을지도 모른다고 하자, "그렇다면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되지" 하면서 미리 써서 인쇄해 둔 종이를 가져오게 한 뒤 기자에게 건넸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다시 만납시다"하며 기자의 손을 잡았다. 묵직하고 따뜻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0/16/2009101601032.html

Posted by Takumi

2009/11/11 14:34 2009/11/11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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