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실제모델 임오경 전 핸드볼 국가대표
"영화 보면서 마스카라가 얼룩지도록 울었다"

4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올림픽이 열리는 것도 아닌데, 온통 핸드볼 이야기다.

임순례 감독이 만든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불씨가 됐다. 개봉 첫날인 지난 10일 12만5000명을 스크린 앞으로 불러모으더니 일주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김정은, 문소리 등 배우들의 열연은 잊혀져가던 2004년 아테네올림픽의 감동을 기억 저편에서 끄집어내어 이 겨울을 따뜻한 감동 스토리로 훈훈하게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2년 만에 올림픽 금메달을 노리는 한국과 올림픽 3연패를 노리는 강호 덴마크는 그리스 아테네 헬레니코 경기장에서 128분간의 사투를 벌였다. 19번의 동점과 2번의 연장전을 갖고도 34 대 34로 승부가 나지 않았다. 결국 승부던지기에서 한국은 2대 4로 무너졌고, 금메달은 덴마크에게 돌아갔다. AP도 아테네올림픽 10대 명승부로 꼽았을 정도로 뜨거운 경기였다.

당시 대표팀의 주장이자 맏언니였던 임오경. 일본 히로시마 메이플 레즈(Maple Reds)의 선수 겸 감독으로 뛰고 있는 그녀는 영화의 모델이자 자문 역할을 가장 많이 한 숨은 주역이다. 15년째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녀를 히로시마에서 만났다.

첫날 저녁, 짧은 커트 머리에 반짝이는 티셔츠와 커다란 목걸이를 한 임오경은 딸 세민(8)이와 함께 나왔다. 그녀의 단골 한국식당에서 부침개와 떡볶이, 잡채를 놓고 마주 앉았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보고 어땠나요?

"영화 보기 전에 인터넷으로 홍보 영상만 보고도 실컷 울었어요. 김정은씨가 저를 모델로 했다고 하는데, 문소리씨가 맡은 역할도 제 얘기처럼 느껴지더군요. 영화를 보면서 제가 살아온 모습을 되돌려 보는 느낌이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좌석에 앉았는데,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죠. 그동안 많이 울었기 때문에 또 눈물이 나겠느냐 하는 심정으로 갔어요. 워낙 예쁜 배우들이 함께 하는 자리라 마스카라까지 하고 갔는데, 결국 엉망이 되도록 울다가 나왔습니다."

임오경은 감정이 북받친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 일본 히로시마 메이플레즈에서 플레잉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는 임오경. /메이플레즈 제공
―주위의 반응은 어떤가요?

"시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어요. '얘, 아가야. 언제 아범이 사업까지 말아먹고 너한테 그렇게 못되게 했느냐'고요. 문소리씨 모델이 저라고 착각하셨던 거죠. 어차피 모델만 따온 것이기 때문에 실제랑은 다른데도 오해를 하시고, 또 속이 상하셨던 거지요. 격려전화도 많이 받았어요. 제 싸이 홈피에도 많은 분들이 찾아와서 응원해주셔서 기분이 좋아요."

―아무래도 선수들이 아닌 배우들이 경기 모습을 재연하려다 보니 좀 어설프다는 지적도 있는데.

"어휴, 그건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죠. 배우들이 석 달 훈련하고 영화를 찍은 거 아시지요? 어지간한 선수들도 석 달 연습해서 그렇게 못 합니다. 핸드볼 선수들도 잘 못 하는 스카이 슛(공중에 뛰어오른 상태에서 패스를 받아 그대로 슛하는 것), 스카이 패스, 백 패스를 멋지게 하시던걸요. 뭐, 연예인들이 몸집이라도 크면 이해하죠. 보통 사람들은 경기장에서 그냥 서너 번 왕복달리기만 시켜도 혀 빼물고 나자빠질 겁니다. 배우들이 대역 안 쓰고 했다는 건 정말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누구 연기가 제일 인상 깊었습니까?

아무래도 저를 모델로 했다는 김정은씨였던 거 같아요. 인상 자체가 연약해 보이는 분이잖아요? 영화에 보면 불암산 뛰는 모습이 나옵니다. 태릉선수촌 뒤에 있는 산이지요. 선수들은 '지옥의 산'이라고 불러요. 거길 토요일에 뛰어올라가야 하거든요. 선수촌에 들어가면 수요일부터 걱정한다는 말이 있어요. 김정은씨를 만나서 물었지요. '진짜 산 뛰었느냐'고. 그랬더니 정말 뛰었다는 겁니다. 물론 나중에 너무 아팠다고 하더군요. 국가대표 선수들도 힘들어서 때로는 걸어가는 코스인데…."

―남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일본에서 같이 지도자 생활 한다더니?

"남편은 지금 일본 배드민턴 주니어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는데, 나가노에 있습니다. 1년에 함께 지내는 기간이 두 달이 채 안 되는 것 같아요."

―선수촌에서 연애를 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남편이 저를 1995년에 선수촌에서 처음 보고 '찍었다'고 하더군요. 한번은 전북 출신 지도자와 선수들 모임이 있었어요. 선수들이 대부분 운동복 차림으로 왔는데, 저는 그때 일본에서 코치 생활을 할 때라 사복을 입고 갔죠. 남편이 저를 보고 '혼자만 튈 일 있어요'라고 핀잔을 주더군요. 내심 기분이 상했죠. 그런데 마침 회식 장소가 보신탕집이더군요. 저는 닭매운탕 시켜서 먹는데, 제 앞에 앉은 남편이 보신탕을 먹기에 '개를 먹고 있는 걸 보니 개로 보이네요'라고 쏘아붙였죠. 혼자 너무했나 싶어 후회하는데, 저녁에 시간 좀 내달라고 하더군요. 그러곤 친구 문제로 상의할 게 있다며 '삐삐'(무선호출기) 번호를 알려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대학로에서 처음 정식으로 만났는데, '네가 내 여자라는 생각이 든다'면서 프러포즈를 했어요."

―그래도 곧바로 결혼은 안 하고 2년 정도 지난 뒤에 결혼했지요?

"남편 속 많이 썩였죠. 주위에서도 좀 더 운동에 전념하라는 얘기도 있었던 터라…. 남편은 그 후로 히로시마에도 자주 왔어요. 그런데 팀 감독을 맡아서 이끌고 있는데 한국에서 웬 남자가 자꾸 오면 모양이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팀 관계자들한테 '결혼할 사람'이라고 덜컥 소개했죠. 그러다가 한번은 남편이 '도둑 키스'를 하려고 했는데, 제가 놀라서 뺨을 때린 겁니다. 이상한 건 뺨을 때리고 나서 제 가슴이 더 뛰는 거예요. 가슴이 뛴다는 걸 남편한테 배운 거죠."

―1년 후배인 오성옥 선수는 올림픽 4연속 출전의 기록을 갖고 있는데, 임 감독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 출전을 못 했지요?

"예. 그때 딸 세민이를 가졌거든요. 결혼할 때는 시드니 올림픽 끝난 다음에 아이를 갖기로 남편과 약속했었죠. 그해 4월에 대표팀 감독님하고도 5월부터 선수촌에 입촌해서 훈련하자고 얘기를 했는데, 5월에 임신 사실을 알았어요. 감독님이 '하늘이 내려주신 아이를 어떻게 하겠니. 너랑 나랑 인연이 아닌가보다'라며 무척 섭섭해하셨죠. 공교롭게 시드니 올림픽에서 여자 핸드볼이 4위에 그치면서 메달을 못 땄습니다. (오)성옥이도 '언니 빈자리가 컸다'며 많이 아쉬워했어요."

―그때 출산하고 한동안은 선수와 감독 생활을 쉬었습니까?

"음, 그게…. 저는 출산 문제로 팀에 지장을 주고 싶지 않았어요. 풀 타임은 아니었지만, 애 낳기 이틀 전까지 시합에 나갔어요.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최강전을 앞두고 미리 낳으려고 병원에 입원해서 촉진제까지 맞았어요. 한국에서 어머니도 오셨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어머님께서 한국으로 돌아가시는 날 산통이 오는 거예요. 혼자 짐 챙겨들고 병원으로 갔고, 같은 팀에서 선수로 뛰던 성옥이가 수발을 해줬죠. 남편은 밤에 와서 애 낳는 것만 보고 그 다음 날 돌아갔고요."

―고생을 했으니 산후 조리가 필요했겠네요.

"아이 낳고 2주 만에 운동하러 갔어요. 선수들이 지퍼 방식으로 윗부분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아기용 바구니를 선물해줬어요. 거기에 세민이를 넣어 들고 훈련장으로 가서 내려놓고 러닝 머신에서 뛰었죠."

―운동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었나요?

"왜 안 했겠어요. 몸은 힘들고, 아이는 점점 커가고…. 비자 받기도 어려워서 어머니를 모셔올 수도 없었어요. 예전에는 잔병치레를 거의 안 했는데, 세민이 낳은 다음에는 감기에 가끔 걸려요. 너무 힘들어서 병원에 가서 침대에 애랑 함께 누워서 링거(수액) 주사를 맞으면서 많이 울었어요. 제 신세가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세민이가 네 살 때 태릉선수촌에 들어갔을 때도 그랬죠. 잠깐 만난 다음에 차를 타고 떠나는 세민이가 차창을 두드리면서 '엄마, 엄마'하고 우는 모습을 볼 때는 정말 미칠 것 같았습니다."

▲ 지난 2일‘우생순’시사회장에서 만난 임오경(왼쪽)과 영화배우 김정은.
―언제 가장 힘들었습니까?

"정말 힘들었던 건 애틀랜타올림픽 직전 봄에 전지훈련을 갔을 때입니다. 슬럼프에 빠져서 제 플레이가 안 되는데 당시 정형균 감독님은 주장인 제게 요구하시는 게 많았죠. 부담이 컸어요. 제 몸과 마음 추스르기도 힘들어서 모든 의욕을 상실했죠. 폴란드에 머물 때 정형균 감독님 방으로 찾아갔어요. '난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다. 돌아가게 여권을 달라'고 했죠. '왜 선생님 입장만 생각하느냐. 내가 죽겠는데, 왜 나보고 누굴 감싸라고 하느냐'고 막 대들었어요.

그래도 워낙 무서웠던 선생님인 데다가 정말 죽기는 싫어서 방문을 일부러 열어놓고 들어갔습니다. 동료들에게 '만약에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면 들어와서 말려달라'고 부탁을 했죠. 믿었던 제자의 반항에 놀란 선생님도 물건을 집어던지시고 막 흥분하시다가 제 얘기를 들으시면서 눈물을 보이셨어요. 그 눈물을 보니깐 뜨끔하더군요. 그래서 시간을 좀 달라고 했죠. 다행히 선생님께서 이해해 주셔서 위기를 잘 넘겼습니다."

―한국 유일의 실업팀 여성 감독이자 해외 여성 감독으로 이름을 올렸지요. 이제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은 안 듭니까?

"저는 '여자라서 안 된다'라는 말을 듣는 게 너무 싫었어요. 한국에서는 결혼을 해도 여자가 참아야 한다는 말이 있지요. 스포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여자가 하면 얼마나 하겠어'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걸 들을 때마다 마음을 다잡았죠. 아, 내가 흔들리면 안 되겠구나, 정말 좋은 모델을 만들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죠."

―그런 면에서 보면 한국보다는 외국에서 지도자 생활하는 게 나을지 모르겠군요. 한국에 들어갈 생각은 없는 겁니까?

"조만간 들어가야죠. 저는 더 많은 걸 해보고 싶어요. 또 다른 꿈이 있는 거지요."

―외국에서는 이룰 수 없다는 그 꿈이 뭐죠?

임오경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에 식은 잡채만 애꿎게 뒤적거리고 있었다. 분명 망설이고 있었다. 자신이 하는 말이 매스컴을 타면 어떤 반응이 올지 예상하고 고민하는 듯했다. 다시 물었다.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건가요?

"아니, 대표팀 감독까지는 욕심이 없습니다. 음… 말해도 되나 모르겠네. 대학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하지만 메달리스트라서 쉽게 들어왔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자격을 갖추기 위해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2년 전부터는 개인 교사한테 영어를 배우고 있어요."

경기 장면을 본 팬들은 짐작하겠지만, 임오경은 '독한 여자'로 정평이 나있다. 한번 마음먹으면 뿌리를 뽑는 성격이다. 1994년 일본어를 겨우 읽을 줄만 알던 그녀는 두 달 만에 일본어를 구사하는 데 거의 불편함을 못 느낄 정도가 됐다고 했다. 원래 잠이 없어서 하루 3~4시간밖에 안 잔다는 그녀다. 그때는 하루 1시간만 자거나, 아예 날밤을 새워가면서 일본어에 매달렸다고 했다.

―대학교수가 그 꿈인가요?

"그건 과정입니다. 스포츠행정과 외교를 담당하는 전문가가 되고 싶은 거죠. 우선 KOC(대한올림픽위원회)에 들어가고, 그 다음엔 IOC(국제올림픽위원회)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선수위원을 말합니까? 쇼트트랙의 전이경 선수처럼 IOC 선수위원을 하겠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핸드볼이라는 종목을 대표하는 선수위원이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정식 IOC위원이 되고 싶은 겁니다. 건방지다고 욕할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번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그때 외출했던 식당 주인이 들어섰다. 그녀는 "임 감독이 히로시마에서 주는 시민상을 작년에 받았다"고 알려줬다. 히로시마의 명예를 드높인 시민에게 주는 상인데, '외국인'이 받은 것은 임오경이 처음이라고 했다.

▲ 박성우-임오경 부부의 가장‘최근’가족사진. 임오경은“1년에 한두 달 정도만 함께 지내는 데다가 서로 아이 사진만 찍다보니 4년 전에 찍은 사진 말고는 셋이 함께 찍은 사진이 없다”고 했다. /임오경 감독 제공
―10년이 넘었으니, 이젠 히로시마가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겠군요. 어떻게 히로시마에 오게 됐습니까?

"저는 욕심이 많았어요. 처음부터 유럽에 가서 외국어 공부를 하고 한국에 와서 석사 박사까지 하고 싶었죠. '운동하는 사람은 멍청하다'는 얘기가 너무 싫었어요. 외국에서는 의사나 변호사들도 올림픽에 나오잖아요. 그게 너무 부러웠어요. 한국체대 4학년 때 유럽에 갈 생각을 하고 있는데, 히로시마에서 새로 팀을 창단한다면서 한국까지 찾아왔습니다. 당시 정형균 교수님(현 핸드볼협회 부회장)이 '창단 팀을 맡아서 한번 일으켜봐라. 그 다음에 유럽에 가도 늦지 않다'고 조언해 주셨죠.

지금까지 팀을 맡아왔던 이유는 인간적인 정 때문입니다. 1995년 세계선수권 MVP를 탔을 때만 해도 스페인이나 오스트리아에서 러브콜이 있었죠. 그런데 메인 후원사인 이즈미 관계자들은 저를 친자식처럼 아껴주셨어요. 저는 3년 안에 팀을 우승시키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임오경은 연봉으로 1억2000만원 정도를 받는다. 일본 기업의 부장급 연봉과 비슷하다. 사는 집과 자동차 유지비 등은 팀에서 내준다.

―핸드볼이 아니라 다른 운동을 할 걸 그랬다 하는 후회는 안 해봤나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장차 국가대표감'이라고 신문에 이름이 나곤 했어요. 서울에서 회사 다니던 언니가 전화를 해서는 '골프 한번 해보겠느냐. 우리 회사 사장님이 스폰서 다 해주시겠다고 한다'고 했어요. 그때 전향했으면 '박세리' 대신 '임오경'이 더 유명해졌을지도 모르지요. 집중력에는 자신이 있어서 아마 골프나 양궁, 사격 같은 종목을 했으면 잘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의 임오경을 있게 해준 건 핸드볼이라는 건 절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다음 날, 니시가와(西川) 원정 경기를 하루 앞두고 훈련 중인 임오경과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히로시마현 체육관을 찾았다. 임오경의 얼굴엔 찬바람이 돌았다. 선수들의 움직임이 자신의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탓일까. "야, 이 바보야." "이리와." 호랑이 감독님의 '한국말' 불호령이 체육관을 쩌렁쩌렁 울렸다. 체육관 한쪽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며 놀던 딸 세민이는 힐끗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림에 열중했다.



임오경은… 

1971년 전북 정읍에서 2남6녀 가운데 7번째로 출생했다. 핸드볼은 정읍 동신초등학교 4학년 때 시작했다. 임오경은 "운동이라면 만능이었지만 특별히 운동선수가 될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핸드볼부 담당 선생님이 "조금만 하다가 싫으면 그만둬도 된다"는 말에 빠졌고, 한 달 만에 나간 대회에서 6학년 언니들 사이에서 혼자 4골을 뽑아내면서 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은메달, 2004년 아테네올림픽 은메달을 따냈다. 1년 후배인 오성옥과 함께 단체 구기 종목 올림픽 최다메달리스트다. 1995년 세계핸드볼선수권대회에서는 MVP에 올랐다.

한국체대 졸업과 동시에 일본 히로시마 메이플 레즈로 이적한 임오경은 1996년부터는 플레잉 감독(선수로도 뛰는 감독)으로 팀을 이끌면서 정규리그에서 8차례나 정상에 올려놓았다.

1998년 배드민턴 국가대표 출신 박성우(37)와 결혼했다. 박성우는 일본 실업팀 지도자 생활을 하다가 2006년부터 일본 배드민턴 대표팀 코치 겸 주니어대표 감독을 맡고 있다.

Posted by Takumi

2008/01/19 17:36 2008/01/19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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