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 없는 전쟁터… 반기문은 외롭다

유엔 사무총장실 인턴 근무 수기


최현미 경북대 영문학과 4학년

  •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 송별 음악회가 끝난 뒤 리셉션 장에서. 사진 맨 왼쪽이 필자,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코피 아난 전 총장.
  • 『사진을 보물처럼 간직하겠습니다』

    지난 3월9일 유엔본부 38층 유엔 사무총장실에서 반기문(반기문·62) 총장께 작별인사를 했다. 지난해 연말 인수위팀 시절부터 가까이서 모셨지만, 유엔 사무총장실이라는 분위기 때문인지 그분이 더 크게 보였다. 세계의 분쟁과 평화를 다루는 자리라는 무게가 느껴졌다.

    반총장은 『그동안 수고했고, 앞으로 잘되길 바란다. 열심히 해서 꿈을 이루라』고 덕담을 해주셨다. 『제가 고생한 것보다 총장님 고생이 더 크셨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반총장이 내게 이런 얘기를 해준 적이 있다.

    『우리 딸이 케냐의 유니세프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과 찍은 사진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더라구요. 내가 유엔 사무총장이 되고 나서, 딸에게 「왜 나하고 사진을 안 찍느냐」고 농담을 했습니다』

    내가 『저도 따님처럼 (반총장님과 같이 찍은) 사진을 보물처럼 간직하겠다』며 사진촬영을 부탁드렸더니, 반총장은 크게 웃으시면서 응해 주셨다. 사무총장실의 비서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사무총장실 문을 나서려니 유엔에서 보낸 날들이 떠올랐다.


  • 인턴 근무를 끝내고 반기문 사무총장과 기념사진을 찍는 필자.
  • 반총장, 오전 8시 간부회의 열어

    2006년 12월14일 나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인수위팀에 「인턴」으로 합류했다. 반총장이 유엔사무총장 취임선서를 한 바로 그날이다. 지난 1월2일 취임 전에는 유엔 본부 맞은편에 있는 「유엔 2 빌딩」에서, 유엔 사무총장 취임 이후에는 본부 건물 38층에서 일했다.
    나는 유엔본부에 오전 7시30분까지 출근했다. 반기문 사무총장이 주재하는 「고위 간부회의」가 오전 8시에 시작하기 때문이다. 

    오전 7시30분까지 출근하려면 맨해튼의 숙소에서 오전 6시30분에 출발해야 한다. 맨해튼의 서쪽 끝인 숙소에서 동쪽 끝인 유엔까지는 버스로 40분쯤 걸린다. 오전 6시에 일어나 매일 종종걸음을 쳐야 했다. 아침은 거의 못 먹었다.

    「인턴 신분증」을 제시하고, 두 차례의 삼엄한 경비를 거쳐 본관에 들어간다. 처음에는 경비원들이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미스터 문」과 잘 아느냐』고 물었다. 반기문 총장의 이름을 미국식으로 「기문 반」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반 기문」이라고 표기했기 때문에 나온 혼선이었다.

    나는 『그분은 「미스터 문」이 아니라, 「미스터 반」』이라고 바로잡아 줬다. 『38층에서 「미스터 반」을 모시고 있다』고 하면, 경비원들은 부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봤다.
    아침에 내가 맡은 일은 반기문 총장에 대한 기사를 인터넷에서 찾아서 정리하고, 한국 외교통상부 직원 사이트에 들어가 반총장 관련 기사를 받는 일이었다.

  • 유엔 본회의장에서.
  • 『유엔의 문화 바꾸겠다』

    오전 8시의 간부회의에는 반총장을 비롯 8명 정도가 참석한다.

    「오전 8시 회의」는 『유엔의 문화를 바꾸겠다』는 반기문 총장의 약속을 상징한다.

    코피 아난 사무총장 시절에는 고위 간부들의 출근시간이 오전 9시였고, 간부회의는 그 이후에 이뤄졌다고 한다. 지금도 유엔의 직원들은 오전 9시에 출근한다. 코피 아난 총장 10년 재임기간 중 정착된 관행이 하루아침에 바뀌기는 어렵다.

    더구나 다국적 직원들로 구성된 유엔 사무처 직원들은 「일을 많이 한다」보다는 「일을 하면서도 내 생활을 지킨다」는 생각이 강하다. 반총장은 솔선수범을 보이려고 「오전 8시 회의」를 계속하고 있다. 고위 간부회의는 오후 6시에 다시 열린다.

    밖에서 보는 유엔과 안에서 보는 유엔은 다르다. 유엔에서는 「총소리 없는 전쟁」이 매일 벌어진다. 각국에서 온 머리 좋은 사람들이 「세계 평화」 이전에 자기 나라의 평화와 이익을 지키려고 애를 쓴다. 「외교」라는 부드러운 언사 뒤에 목숨을 건 싸움이 숨어 있다.

    인수위 시절, 제일 인상 깊었던 방문객은 아델 압둘 마흐드 이라크 부통령이었다. CNN을 통해 그가 몇 차례 테러를 당해 목숨이 위험할 뻔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內戰(내전)을 치르고 있는 이라크의 국익을 위해 반장관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반총장을 향한 「길들이기」와 「견제」는 어쩌면 당연한 통과의례였다.
    취임 직후, 유엔 주재 파키스탄 대사무니드 아크람이 『반총장이 독단적으로 업무를 추진하고 있다』고 공개비판하고,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세계의 주요 언론이 「반기문 총장이 사형에 반대하는 유엔의 공식 입장도 모르고 있다」고 거세게 비판했다.

    「미국의 군사동맹국인 한국 출신 반기문 사무총장이 유엔을 미국의 이익 쪽으로 끌고 가지 않겠느냐」는 의혹의 시선이 제3세계 진영에 적지 않았다.


  • 반총장의 살인적인 스케줄

    반총장은 취임 이후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

    인수위 시절에는 한국에서 파견 나온 김원수 대사 등 한국 직원들과 자주 만나 이런저런 상의를 할 수 있었지만, 취임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다국적 스태프들과 주요 간부들이 보좌를 하고 있어, 외교부에서 파견된 한국 외교관들도 특별한 용무가 없으면 반총장을 뵙기 어려워졌다. 경호가 인수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세졌다.

    크리스마스 무렵 한 번, 그리고 금요일 밤에 세 번 반총장 부부와 함께 식사를 했다. 맨해튼에 있는 한식집 「강서회관」, 「금강산」, 「코리아 팰리스」 등에서였다. 일 얘기를 한다기보다는 김원수 대사를 비롯한 한국인 스태프들과 閑談(한담)을 했다. 스트레스를 푸는 자리였다.

    반총장은 『이만하면 세계 언론들이 잘 봐주는 것 아니냐』며 우스갯소리를 많이 했다. 일의 양이야 인수위 시절이 훨씬 많았겠지만, 취임 이후 업무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늘어난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작별인사를 할 때 반총장님의 얼굴이 밝아 보여서 안심이 됐다.

    인수위 시절부터 반총장은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했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10분 단위로 미팅 일정이 잡혀 있고, 반총장 사무실 앞의 테이블에는 항상 누군가가 대기하고 있었다. 반총장은 손님을 배웅하러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가, 다음 손님의 손을 잡고 곧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손님이 누구인지 설명을 받지 못해, 누가 누구인지 헷갈려 할 때도 있었다.

    미팅이 길어져 다음 미팅이 미루어지면, 김원수 대사(現 유엔사무총장 특별보좌관)가 대신 미팅을 가지고, 그 미팅마저 밀리면 그 다음 직급의 한국 외교관이 대신 미팅을 하기도 했다. 그 미팅을 보좌하는 우리는 화장실에 갈 시간조차 갖기 어려웠다. 반총장이 혼자 사무실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 유엔빌딩 38층에 있는 유엔 사무총장 특별보좌관 사무실에서.
  • 『일 많아서 스트레스 받는 일 없다』

    반총장은 지난해 연말 일주일간 한국으로 출장을 가셨다. 뉴욕 사무실에 남은 나와 직원들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반총장께서 한국에서 얼마나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드디어 뉴욕으로 돌아오시는 날, 「오후 1시쯤 케네디 공항에 도착한다」는 전갈을 받았다. 우리는 「피곤하실 테니, 오늘은 쉬시고 내일 나오시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후 2시쯤 반총장이 인수위 사무실로 들어오는 게 아닌가!
    그뿐 아니다. 『식사는 비행기 안에서 했다』며, 언제 출장을 갔다 왔냐는 듯 바로 뉴욕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서 뉴욕까지의 비행시간은 14시간이다. 젊은 사람들도 시차를 극복하기 쉽지 않다. 한국에서 휴가를 즐긴 것도 아니고,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일정을 소화했는데, 곧바로 출근을 한 게 믿기지 않았다. 연세가 있으신 분이 그런 대단한 체력과 정신력을 가진 것이 놀라웠다.

    반총장을 오래 모신 한국 외교관들에게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물어봤다.  

    『그분이 워낙 선비 체질이에요. 공부하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원래 일을 좋아해서, 일이 많아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별로 없으신 것 같아요. 피곤하면 토막 잠을 주무시죠. 비행기 안이든, 차 안이든 머리만 뒤에 붙였다 하면 금방 잠이 듭니다. 달리 하는 운동이 없으시고, 그렇게 피로를 풉니다』

    지난해 12월14일 유엔 사무총장 직 인수위팀에 합류하기 전 나는 9개월간 「더 어드밴스 그룹(The Advance Group)」이라는 정치 마케팅 회사에서 인턴으로 근무했다.

  • 크리스마스도 없이 일하다

    원 혹은 하원 의원으로 출마하려는 사람들의 의뢰가 들어오면, 여론조사를 해주고, 지역구 홍보활동을 대행해 주는 회사다. 나는 정치자금 모금을 위한 「디너 파티」를 열기도 했다. 「정치 마케팅」이라는 다소 생소한 분야의 일이었지만, 여기서 익힌 어려운 정치·외교 용어가 인수팀에서 일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인수팀에서 나는 한국 외교통상부에서 파견 나온 외교관 5명과 유엔 직원 1명을 도왔다.

    10년 만의 사무총장 교체였기 때문에 세계 유수 언론의 인터뷰 요청, 유엔 주재 대사와 주요국 정치 지도자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다.

    나는 미팅의 회의자료를 준비하고, 각종 데이터를 관리하는 일을 했다. 매일 밤 9~10시까지 그날 있었던 미팅의 자료를 정리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이제껏 그렇게 많이 일을 해본 것은 처음이다. 매일 오전 7시부터 오후 9시까지, 휴일 없이 일했다.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까지 일을 했다. 사무실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서인지, 석 달 정도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3년은 함께한 듯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 반총장 취임식

    지난 1월2일 오전 10시 취임식이 있는 유엔 총회장에 들어갔다.

    텔레비전에서만 보았던 큰 회의장과 유엔의 심벌이 눈에 확 들어왔다. 「내가 정말 유엔에 들어온 거구나」 실감이 났다. 신임 사무총장의 선서식에 앞서 코피 아난 前 사무총장의 연설이 있었다. 연설이 끝나고 코피 아난에게 쏟아지는 존경의 박수가 5분 이상 계속됐다. 반기문 사무총장이 10년 후 더 큰 갈채를 받을 수 있기를 속으로 빌었다. 반기문 신임 사무총장의 취임 선서식이 거행되자, 장내가 조용해졌다. 모두의 기대와 설렘 때문이었으리라. 다시 한 번 한국인으로서,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의 탄생에 자부심을 느꼈다.

    1월2일 유엔 건물의 로비. 많은 직원들이 나와서 첫 출근하는 반기문 총장을 따뜻하게 맞이 했다. 직원들은 구내방송을 통해 반총장님의 기자회견, 다른 나라에 있는 유엔기구 수장들과의 화상회의를 주의 깊게 지켜봤다. 「반기문 10년」이 어떻게 전개될지 호기심에 가득찬 눈으로.

    한번은 문서를 들고 급하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장에 들어가 전달했다.

    우라늄 농축을 고집하고 있는 이란에 대한 제재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지금 어디에선가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세계 평화를 위한 결정이 내려지는 자리에 섰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유엔은 세계의 분쟁을 다루는 현장이다. 제3자가 아닌 당사자의 입장에서 국제 문제를 바라본 경험은 국제관계 전문가가 되고 싶은 나의 꿈을 다지는 계기가 됐다.

    나는 반총장을 보좌하는 김원수 사무총장 특별보좌관(사무차장보級) 사무실에서 일했다. 반총장 집무실에서 가깝다. 38층에는 일 잘하기로 소문난 직원들이 뽑혀서 일한다.

  • 인도 출신의 사무총장실 고참직원 로즈메리(오른쪽)와 함께.
  • 감동의 오케스트라 협연

    직원들은 대부분 50代다. 『인턴이 38층에서 일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라며 나를 격려해 줬다. 첫 출근 날, 나의 휴대폰에 「전파 수신이 안 된다」는 표시가 나타났다. 고장이 났나 휴대폰을 이리저리 살펴보자, 옆자리의 동료가 이렇게 알려 줬다.

    『38층에서는 휴대폰 전파 수신이 잘 안 돼요. 어쩌다 전파가 수신되면, 모두들 화장실로 뛰어갑니다. 전화가 화장실에서만 터져요』

    통신 보안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그때부터 나도 휴대폰을 이용하기 위해 화장실로 뛰어다녔다.

    그래도 휴대폰 수신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내 휴대폰 번호가 바뀐 줄 아는 친구들이 생겼다.

    유엔 총회장에서 떠나는 코피 아난을 위한 음악회가 열렸다.
    오케스트라 협연이었는데, 오케스트라의 구성원들은 모두 아랍계였다. 이란·이라크·사우디아라비아·요르단…. 대표적인 분쟁지역의 음악가들로 구성됐지만, 세상의 그 어떤 오케스트라보다 아름다운 선율을 쏟아냈다.

    가슴이 찡해졌다. 사람들은 모두가 가족을 사랑하고, 평화를 원하는데, 왜 세상에는 분쟁과 살육이 끊이지 않는 걸까? 이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하모니처럼 세계가 조화를 이룰 수는 없을까?

    음악회가 끝나고 리셉션장에서 코피 아난 前 총장을 만나 악수했다.

    중·고등학생 시절 텔레비전 퀴즈 프로그램에서 많이 듣던 「코피 아난」을 만난 것이다. 나는 코피 아난과 악수하면서 눈으로 그와 교감을 했고, 인사를 건넸다.

    『세계를 위한 당신의 헌신에 감사합니다』『고맙습니다』
    이 한마디 대화만으로 일주일간 가슴이 설다. 

  • 내가 만든 서류가 국제회의에 사용되는 짜릿함

    매일 아침 반기문 총장 관련 언론 보도를 정리하면서, 국제적인 이슈에 차츰 익숙해졌다.
    세계 주요 언론의 보도에 따라 그날 유엔에서는 대책회의가 열린다. 내가 준비한 문서와 자료로 국제 이슈에 관한 회의가 진행되고, 중요한 정책결정이 이뤄진다는 사실에 기분이 상기되었다. 어려서부터 외교관이 꿈이었던 내게 이런 기회가 주어진 게 믿기지 않았다.

    하루는 저녁에 일을 하고 있는데, 한 여성이 다가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누군지 모르고 엉겁결에 일단 인사는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신임 사무차장이었다. 뉴스에 나오는 국제정치의 거물들을 불쑥불쑥 만난다는 일이, 실감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내 옆자리의 동료는 50代의 인도 여성 로즈메리다. 아주 친근하며 일을 잘했다. 서류 처리를 할 때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관련 서류를 모두 복사해 둔다.
    팩스를 보내고 나면 나는 그냥 끝이었지만, 로즈메리는 전송 사인이 나오는 프린트를 따로 파일로 묶어서 관리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말 끝에 「디어 마이 프렌드(dear, my friend)」라고 했다. 20여 년간 사람들을 그렇게 대했기 때문인지, 미팅을 위해 찾아온 유엔 주재 대사와 주요 간부들이 로즈메리를 친구처럼 대했다.

    영어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때로 정말 빠른 영어나,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발음은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로즈메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요청했다.
    로즈메리는 나의 어머니와 나이가 비슷하고, 로즈메리의 아들이 내 또래여서, 나는 가끔 장난삼아 『맘(mom)』이라고 불렀다.

    한번은 흔치 않은 색상인 초록색 블라우스에 검은 바지를 약속이나 한 듯 둘이서 같은 날 입고 출근했다. 모두들 지나가면서 『유엔에서 언제부터 유니폼을 입기 시작했느냐』고 한마디씩 했다.

    38층에는 여직원들이 많이 일하고 있다. 남녀차별은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여초현상이 심하다. 우리 여대생들이 더욱 분발하고, 도전한다면 유엔에서 많은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

    2006년 3월, 나는 취업을 준비하는 다른 4학년들과 달리 인턴으로 일하기 위해 뉴욕으로 향했다.
    졸업하기 전 세계 최고의 도시라는 뉴욕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싶었다. 염려하는 부모님 몰래 인턴십을 준비했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세운 계획을 들으시고 미국行을 허락해 주셨다. 

    뉴욕 공항에 도착하니 뿌듯함과 비장함, 설렘이 교차했다. 뉴욕에 오기 전 한국에서 웹사이트를 통해 알아봤지만, 그래도 살 곳은 직접 보고 결정해야 될 것 같아서 현지에서 집을 구하기로 했다. 집값이 비싸서 룸메이트랑 살기로 결정했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싶어서 맨해튼에 둥지를 틀었다.

    시차적응을 하고, 도착 일주일째 되는 날 방을 구했다. 짐을 풀고 앞으로 1년 동안 지내게 될 나의 공간에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웹사이트를 통해 중고 가구들을 샀고, 갖가지 가재도구들을 한 사람으로부터 헐값에 샀다.

    뉴욕에 오기 전, 「이제 혼자니깐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단단히 마음 먹었다.

    거울을 사서 혼자 못질을 해서 걸었다. 혼자서 살림을 장만하고, 이렇게 저렇게 집을 바꿔 가는 내 모습이 신기하고 자랑스러웠다. 서툴기는 하지만 그렇게 서서히 거대한 도시 뉴욕에서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서 낯선 뉴욕 땅에 정착하고, 외로움을 이겨냈다. 정치 마케팅 회사에 나가서 인턴십을 하고, 친구를 사귀었다. 이제껏 내가 한국에서 했던 것보다 2배 이상의 노력이 필요했다.

  • 인류는 하나

    세계에서 모여든 젊은이들을 만나면서 포용력이 생겼다. 세계의 수도 뉴욕에서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의 흐름, 시야를 넓히게 되었다.

    경북大와 연계된 「뉴욕 인턴십 프로그램」은 일주일에 한 번씩 4시간 영어수업을 하고, 저명인사를 초청해서 세미나를 갖는다. 매주 금요일 열리는 이 시간은 자칫 슬럼프에 빠지기 쉬운 학생들을 다잡아 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 경북大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부족한 영어실력을 다듬었다. 영어 시간에는 주로 이메일 쓰기와 작문을 했다. 영어를 알지만, 당황하면 말이 안 나오는 우리의 고충을 풀어 주려는 수업이었다.

  • 일년간의 인턴십을 통해 나는 「어디에 가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全세계 젊은이들이 모여 있는 뉴욕의 빌딩 숲에서, 「인류는 하나」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언젠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을 나를 그려 보며 오늘도 열심히 나의 꿈을 향해 달린다.

Posted by Takumi

2007/04/28 17:23 2007/04/28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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