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최우석 특파원 wschoi@chosun.com
베이징=이명진 특파원 mjlee@chosun.com
도쿄=정권현 특파원 khjung@chosun.com
한·미 FTA협상 타결은 한국과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과 인접한 중국과 일본도 그 후폭풍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순수 경제적인 측면과 동북아정세 변화 측면에서 각국이 생각하는 ‘한·미 FTA 계산법’을 점검했다.

美, 급부상하는 중국 견제… 쌀 시장 진출은 실패
미국이 한·미 FTA를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은 굳건한 한·미 동맹이다. 정치·군사적 측면에 치우쳐 있던 한·미 동맹이 경제 동맹으로까지 확대되면서 미국은 한국과 함께 정치·경제적으로 급부상하는 중국에 공동 대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 기업연구소(AEI)의 클로드 바필드(Barfield) 수석연구원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한·미 FTA는 양국간의 경제적 교류 증대보다 더 큰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진단했다. 한·미 FTA의 경제적 효용성이 외교·안보 등으로 넘칠(spill over) 것이라는 설명이다. 바필드 연구원은 “단순히 북한 문제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 부상하는 중국의 영향력 등 한·미 간에 공동 대처할 수 있는 이슈들이 많이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적 성과도 상당히 컸다. 미국은 한국에서 쇠고기 시장 개방을 약속 받았다. 한국 시장이 개방되면 미국은 최고 10억달러어치 쇠고기를 해마다 수출할 수 있게 된다. 미육류연구소(AMI)에 따르면 육류 수출이 10억달러 늘어날 때마다 1만3000명의 고용 창출 효과가 나타난다. 한국은 광우병 파동 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3대 수출 시장이었다.
미국은 농산물 수출에서도 큰 소득을 올렸다. 한국으로 수출되는 16억달러 상당의 미국산 농산물 가운데 절반이 즉시 관세 철폐 대상이다. 당연히 수출이 증가할 것으로 미 업계는 예상한다. 이 밖에 미국은 한국의 방송시장에도 뛰어들 수 있게 됐고, 지적재산권 유효 기간도 50년에서 70년으로 늘리는 수확을 얻어냈다.
그러나 쌀 시장 개방에 실패했고, 한국의 자동차 시장 진입에도 큰 효과를 보지 못할 전망이다.
中, “美시장서 한국제품에 경쟁력 밀린다” 우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한·미 FTA 타결과 관련, “미국시장에서 한국 제품의 경쟁력 강화가 중국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미국 시장에서 지난해 1400억 달러가 넘는 무역 흑자를 내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한·미 FTA 협상에서 관세율이 인하된 섬유·생활용품 등 분야의 대미 수출에 타격이 예상된다. 왕융(王勇) 베이징대 국제정치경제연구센터 주임은 “특히 북한의 싼 노동력을 활용한 제품이 한국을 경유해 미국에 수출이 가능해진다면 한국이 다시 한번 섬유 수출 르네상스를 맞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농산물과 쇠고기도 한국 시장에서 값싼 미국산 제품에 밀리게 될 것이라는 것이 중국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중국으로선 해외 투자 유치의 감소도 문제다. 경제 웹사이트인 중국경제망(網)은 “세계 각국 기업들이 ‘중국 포기, 한국 투자’ 결심을 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반면 ‘오히려 기회’라는 분석도 있다. 주중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중국이 한국에 투자를 확대함으로써 대미 우회 수출을 늘릴 수 있고, 부품과 원자재의 한국 수출도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가격 경쟁력에만 의존하던 중국 기업들도 한·미 FTA에 자극받아 기술 개발과 투명성 제고 등에 더욱 주력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중국은 한국과의 FTA 체결도 서두를 움직임이다. 위융딩(余永定) 중국사회과학원 세계경제정치연구소장은 “한·중 FTA에 대해 중국은 적극적이다. 한국의 노동계와 농민의 반발이 관건이다”라고 말했다.
중국 전문가들은 한·미의 밀착으로 동북아에서 중국 입지가 약화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지만 한·미관계 증진이 중국에 나쁠 게 없다는 반론도 있다.
日, 안보 측면선 환영… 수출산업 불리해질까 경계
“안보 측면에선 환영할 일이지만, 수출경쟁력 저하가 걱정된다.”
한미 FTA 타결에 대한 일본의 계산은 복잡하다. 전시작전권 반환 문제 등 악화일로에 있던 한미관계가 FTA 타결을 계기로 호전되는 것을 반기는 반면, 일본의 수출산업이 한미 양국과의 경쟁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지 않을까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무엇보다 한국의 농업개방으로 일본이 앞으로 농업자유화를 촉구하는 국제적 압력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일본 재계 쪽에선 미·일 간에 조속한 교섭을 촉구하고 있지만, 정부의 움직임은 여전히 느린 편이다. 경단련이 작년 11월 미·일 간에 FTA보다 더 포괄적인 EPA(경제연대협정) 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고 요구한 데 대해, 정부는 WTO 교섭에 악영향을 준다며 거부하고 있다.
일본 정부로서도 최대 난제는 역시 농업개방. 개방 반대파를 설득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차라리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이다. 현재 일본은 2002년 싱가포르와 EPA 협정을 체결한 것을 시작으로 멕시코,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5개국과 협정을 체결했고 타이,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등과는 협정에 대체적으로 합의한 상태다.
일본은 당장은 한국이 FTA를 무기로 미국시장에서 경쟁하는 자동차 전자제품 등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힐 것으로 보고 대책 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일본이 미국 시장에서 월등한 우위를 차지하는 자동차의 경우 한국 자동차의 상대적 가격 경쟁력 우위를 경계하는 시각이 있는 반면, 일본 자동차 메이커들의 현지 생산이 늘어나고 있어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정점으로 치달으면서 긴장감이 가시지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펼쳐진 수를 읽는 절차만 남았다고 평가한다. 다른 일부에서는 주요 쟁점 분야의 대립각이 여전하므로 많은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는 시각을 나타낸다.
무역구제 분야는 실질적인 중요도에도 불구하고 특정 산업이나 이해 당사자에게 국한되지 않음으로 인해 협상 비중이 약화되었다. 5차 협상에서 우리 측의 5개 요구사항을 미국 측이 수용할 수 없다고 하여 협상이 중단된 이후 중요한 6차나 8차 협상에서도 전혀 논의되지 못하였다.
무역 자유화로 인한 자국 산업의 피해를 보전해주기 위한 무역구제 조치로는 반덤핑관세와 상계관세 부과, 세이프가드가 있다. 우리나라가 FTA 협상에서 반덤핑관세 부과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미국이 비관세 장벽 조치로 가장 빈번하게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5년부터 2006년 상반기까지 세계무역기구(WTO)에 신고된 세계 전체 덤핑행위 조사건수는 2,938건이었는데, 미국이 착수한 것이 366건으로 인도(448건)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했다. 같은 기간 동안 반덤핑관세 조치를 실제로 부과한 건수로도 세계 전체 1,875건의 12.6%는 미국의 몫이었다. 미국의 덤핑행위 조사 대상국들 가운데 우리나라는 중국, 일본에 이어 3번째로 많은 건수를 제소당했다.
미국이 세계 최대 교역국이므로 반덤핑관세 부과 건수도 이에 비례하여 많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의 반덤핑법이 불합리하게 적용되어 온 영향도 크다고 판단된다. 이는 WTO가 지난해 말 미국에게 제로잉(zeroing)조항 수정을 요구한 사실로도 반증되었다.
한미 FTA 협상에서 무역구제 부문을 쉽게 양보할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첫째, FTA 체결 이후에도 무역구제 조치가 비관세 장벽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반덤핑관세와 상계관세의 부과 요건은 자의적으로 적용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산업피해의 판단 기준으로 수익성 저하나 고용 여건 악화를 설정할 경우 이러한 결과가 특정 수입상품의 덤핑행위에서 비롯된 것인지, 경기변동이나 부실경영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분별하기란 간단하지 않다. 둘째, 미국의 반덤핑 규제는 공정거래 질서 확립의 목적 이면에 자국 사양산업의 보호라는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이번 협상을 통해 미국 섬유 및 자동차 시장의 개방을 얻어낸다 하더라도, 우리 수출 상품의 저가 경쟁력이 덤핑행위로 오인되거나 미국 내 산업피해가 확대 해석될 소지는 그대로 남아있다. 일례로 철강제 로프와 케이블 수출업체인 DSR제강은 1990년대 후반 미국 상무부로부터 3차례나 덤핑행위로 제소를 당했으나 모두 무혐의 처리되었다. 조사 기간 동안 해당 업체는 막대한 기회비용과 거래비용을 아무 보상없이 지불해야만 했다. 셋째, 반덤핑 조치는 조사과정에서도 수입규제의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덤핑행위 의혹에 대한 조사가 착수되고 예비판정 결과 잠정조치가 취해지면 최종 판단 이전에라도 반덤핑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 넷째, FTA 협상은 절차보다 실익이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 협상단은 우리 측이 요구한 무역구제 관련 5개 조항은 법 개정을 필요로 하므로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진작 표명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최대 규모의 FTA 협상을 진행하면서 상대국의 국내법 절차를 존중하기 위해 국가 실익을 일방적으로 양보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고위급 협상에서 우리 측이 양보안으로 제시한 “무역구제협력위원회”의 FTA 발효 이후 설치 건은 차선책이라고 위안삼기에는 아쉬움이 크다. 위원회 설치를 협정문에 명시하면 미국이 우리 기업에 반덤핑 조치를 남발할 수 없으리라는 기대는 순진하다 못해 애처로운 구애의 모습처럼 비친다. 한미 FTA 협상의 고지를 지척에 두고 중도하차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최선의 협상 결과에 이르기 위해서는 꿋꿋이 나아가야 한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 이 글은 2007년 3월23일 언론에 투고한 내용이다
-내가 1년동안 가르침을 받은 김태황 교수님이 기고하신 글이다...-
韓·美 FTA 진두지휘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 인터뷰
대담:박정훈 경제부장
정리=홍원상 기자 wshong@chosun.com
9일 서울 세종로 통상교섭본부장 접견실에서 만난 김현종(金鉉宗·48) 통상교섭본부장은 감기 몸살에 목도 약간 잠겨 있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에 고무돼 있을 법도 한데, 평소의 냉정한 자세를 풀지 않는다. 표현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고르고, 1시간의 인터뷰 동안 거의 웃지도 않았다. 그는 EU(유럽연합)와 중국은 물론, 러시아가 WTO(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는 대로 러시아와도 FTA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우선 그를 포함한 협상팀에 쏟아진 찬사부터 물어보았다.
―웬디 커틀러 미측 수석대표가 한국 협상팀을 ‘최강팀’이라고 극찬했다는데, 많이 얻어냈다는 만족감에서 나온 립서비스(말만의 칭찬)는 아닐까.
“협상 결과는 100점은 아니고 중간 이상 정도로 보면 딱 적당한 것 같다. 김종훈·커틀러 양측 대표가 서로에게 코멘트 한 것은 정말 잘했다기보다 협상 결과가 (양측 이익에) 균형이 이뤄진 결과라는 뜻에서 한 얘기라고 본다.”
―서민들로선 한·미 FTA가 가져다 줄 혜택이 실감나지 않는다. 예컨대 동네 수퍼마켓 주인이 ‘나에게 무엇이 좋아지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겠는가.
“소비자 후생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중간층의 소비자들에겐 선택권도 많아지고 물건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게 된다. 경쟁을 통해 서비스를 향상시킬 수 있는 점도 혜택 중 하나다.”
왜 멀리 떨어진 미국부터 FTA 했나
먼 나라와 친교, 가까운 나라 공략 손자병법에도 나와있지 않나
―FTA를 왜 멀리 떨어진 미국부터 했느냐고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손자병법을 읽은 것과 안 읽은 것의 차이다. 원교근공(遠交近攻·먼 나라와 친교를 맺어 가까운 곳을 공격한다)이라고 하지 않나. 미국과 유럽·러시아·동남아 사람들은 이 지역 패권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런 면에서 우리와 공통점이 있고, 이들과는 FTA를 더 편하게 추진할 수 있다. FTA는 단순히 주판알만 튕기기보다 우리와의 역사적 관계 등 전략적인 것을 모두 감안해서 추진해야 한다.”
김 본부장은 “역사에 대해서 확실하게 바로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걸 모르고 FTA 전략을 세우는 것은 난센스”라고 말했다.
―김 본부장은 외국에서 공부해 우리 역사는 잘 모를 것이라는 인식이 있는데.
“내가 가장 많이 보는 게 세계지도와 역사책이다. 언제 한번 제 서재를 보여줘야겠다. 제가 (한국에) 오자마자 읽은 것이 한·미·일 역사책이다. 케임브리지 히스토리(Cambridge History)에 명나라와 우리 역사에 대해 잘 기록돼 있던데, 조선시대에 우리가 잘했던 것, 못했던 것을 다 읽었다. 이준 열사에 대해서도 관련 책들을 읽었다. 개항 시절 조선의 공사(公使)가 일본에 갔을 때 썼던 100페이지 메모도 갖고 있다. 그때 우리의 애로사항들, 이런 것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FTA 반대론자들은 김 본부장이 대부분 교육을 외국에서 받았기 때문에 국가관이 약하다고 평가한다. 김 본부장이 생각하는 국가관은 무엇인가.
“저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 (멋쩍은 웃음) 국익이 중요하다. 국익을 위해선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 내가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면 100만원을 벌 수 있는 것도, 예컨대 90만원만 벌겠다고 마음먹고 즐기며 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국익에 관한 한 그게(타협을 의미) 안 된다.”
―유년·청소년 시절 줄곧 한국을 떠나 있었는데, 한국의 서민과 민중·기층민의 정서를 이해해 국익에 반영시킬 수 있나.
“이번에 협상하면서 제일 가슴 아팠던 것이 농업이다. 우리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민감 품목에 대해 예외나 현행관세 유지를 얻어내고 세이프가드 장치도 마련했지만 그 분야에 대해선 가슴이 아팠다. 내가 국회에서 말했듯이 국내 대책 및 보완책을 확실히 마련해야 한다.”
쌀을 포기 못하는 이유는
전쟁 경험있는 우리에겐 식량 안보차원에서 중요
―중국과 FTA를 맺으면 국내 농업에 가공할 파괴력이 예상된다. 중국은 자기들이 먹지 않는 자포니카(우리가 먹는 중단립종) 쌀을 동북3성에서 재배할 정도로 한국 농산물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농업은 보호해야 한다. 그게 안 되면 (중국과 FTA를) 안 하는 것이다. 매번 FTA를 할 때마다 쌀은 예외로 지켜왔다. 중국도 농산물의 민감성을 잘 알고 있다. 중국에 대해서도 이 룰(10% 예외)만 적용받으면 민감한 농산물을 보호할 수 있다.”
―국익이 최우선 기준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쌀을 포기하고 다른 분야를 얻는 게 국익에 더 도움이 되지 않나.
“국민 정서 문제다. 농사 짓는 분의 상당수가 쌀 농사를 짓고 있다. 식량 안보차원에서도 쌀이 중요하다. 그래서 양보하지 못한다.
김 본부장은 쌀을 식량 안보 차원에서 보는 근거로 “우리는 전쟁경험이 있고 북한이 아직 존재하고 있다”고 말했다.
―FTA로 개방과 경쟁을 강조하면서도 교육의 ‘3불(不) 정책’이나 지역 균형발전 전략 등을 보면 이와 상충된다는 지적이 나오는데.
“그건 교육부 장관에게 물어보셔야죠. 전 한국에서 교육도 거의 받지 않았는데….”
―세계무역기구(WTO)에 근무할 때 무엇을 배웠나.
“그때 보니까 우리나라는 참 가능성 있는 나라더라. 한국 젊은이들의 능력과 창조력은 어디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워너브러더스(미국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사)의 애니메이션은 한국 만화가가 다 그린다. 한국 만화가의 창조성을 못 따라간다고 한다. 일본의 정부조달 사업에도 우리의 IT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개방이 중요하다.”
金본부장, 우리 역사 잘 모른다는데…
세계지도·역사책 가장 애독 언제 한번 서재 보여드리죠
―통상전문가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제일의 덕목이라면.
“협상을 언제든지 깰 수 있다는 자세다.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렸고, 많이 투자했더라도 조건이 안 맞고 내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깰 수 있어야 한다.”
―협상팀으로서는 협상을 깨는 부담이 상당할 것 같은데.
“부담은 상당하다. 하지만 언제든지 중단할 수 있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일본과 (FTA 협상 때) 그렇게 하지 않았나. 1년 넘게 협상을 했지만 일본이 당초 약속(농산물시장 90% 개방)을 지키지 않았다. 협상에 임하는 접근 방법을 보니까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중단시켰다.”
―공직자 재산공개 때 보니, 재산이 10억원이 채 안 됐다. 국제 통상 변호사 등으로 활동하면서 재산을 많이 모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홍익대 교수로 재직할 당시 받는 게 적었고…, (WTO 수석고문변호사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생활할 때에는 물가가 워낙 비싸서 세이빙(저축)이 안 됐다. 그리고 공직 생활을 4년간 했는데 적지 않은 월급이었지만 많이 모으진 못했다.”
그는 미국의 로펌(법률회사)에 들어간 이듬해인 1986년 귀국해 석사 장교로 6개월간 군 복무를 했다. 아무리 6개월 단기 복무라지만, 외국 생활에 익숙한 그로선 단체생활이나 기합 등이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한민국 남자라면 모두 다녀오는 곳 아닌가.”
전방 근무는 어디서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라고 대답했다. 기자가 복무한 곳과 같은 곳이었다.